
얼마 전 학생이 글을 쓰다가 손을 멈췄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는 익숙한데, ‘나이가 지긋이 들었다’에서는 왜 받침을 써야 하느냐는 거였지요. 두 말은 모두 [지그시]로 읽힙니다. 소리만 듣고 적으려 하면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는 먼저 그 말이 문장에서 무엇을 나타내는지 보는 편이 좋습니다.
눈을 감을 때는 왜 ‘지그시’일까요?
‘지그시’는 슬며시 힘을 주는 모양을 나타냅니다. 눈을 지그시 감거나, 손바닥으로 문을 지그시 누르거나, 발로 바닥을 지그시 밟을 때 쓸 수 있지요. 동작이 거칠거나 갑작스럽지 않다는 느낌이 함께 전해집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는 눈꺼풀에 힘을 주되 조용히 감는 모습을 떠올리면 자연스럽습니다.
이 말에는 ‘조용히 참고 견디는 모양’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픔을 지그시 참았다’가 그런 예입니다. 여기서는 무엇을 누르는 손의 힘보다, 감정을 밖으로 터뜨리지 않고 견디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같은 ‘지그시’라도 뒤에 오는 말에 따라 장면이 조금 달라지는 셈입니다.
가령 ‘손잡이를 지그시 눌렀다’와 ‘화를 지그시 참았다’를 나란히 놓아 보세요. 앞 문장에서는 손의 움직임이 보이고, 뒤 문장에서는 마음을 누르는 태도가 느껴집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도 이 두 뜻을 따로 풀이합니다. 어느 쪽이든 표기는 ‘지그시’입니다.
나이와 끈기를 말할 때는 ‘지긋이’입니다
‘지긋이’는 ‘나이가 비교적 많아 듬직하게’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나이가 지긋이 든 분’이라고 하면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고, 연륜이 느껴지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는 나이가 지긋이 들어 보였다’처럼 쓸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지그시’를 넣으면 뜻을 제대로 전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긋이’를 나이에만 쓰는 말로 외우면 또 놓치는 문장이 생깁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참을성 있게 끈지게’라는 뜻도 실려 있습니다. ‘아이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지긋이 앉아 있었다’, ‘어려운 문제를 지긋이 붙들고 풀었다’처럼, 쉽게 자리를 뜨거나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나타낼 수 있지요.
그래서 ‘참다’라는 느낌 하나만으로 두 표기를 고를 수는 없습니다. ‘아픔을 지그시 참다’는 고통을 조용히 견디는 모습이고, ‘지긋이 앉아 기다리다’는 한자리를 지키며 끈기 있게 버티는 모습에 가깝습니다. 문장 전체가 그리는 장면을 읽어야 합니다.
받침 하나가 남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지긋이’의 표기에는 ‘지긋하다’가 실마리가 됩니다. ‘나이가 지긋하다’, ‘지긋하게 기다리다’에서 보이는 ‘지긋’에 ‘-이’가 붙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긋’의 뜻이 이어지므로 그 모양을 밝혀 ‘지긋이’로 적는 것이지요. 한글 맞춤법 제25항은 ‘-하다’가 붙는 어근에 ‘-이’나 ‘-히’가 붙어 부사가 될 때 어근의 원형을 밝혀 적도록 합니다. 국립국어원의 맞춤법 해설도 ‘지긋하다·지긋이’를 그 예로 듭니다.
그렇다면 ‘지그시’도 ‘지긋’에서 왔다고 보고 ‘지긋이’로 적으면 될까요? 그렇게 연결할 근거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국립국어원은 ‘지그시’에 대해 ‘지긋하다’와 의미상 큰 관련이 없어 보이며, 사전에 어원 정보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닮은 소리가 난다고 해서 두 말에 같은 뿌리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거지요. ‘지그시’는 사전에 올라 있는 말 그대로 적습니다.
두 표기는 발음이 같아서 받아쓰기를 할 때 특히 어렵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의 소리는 ‘지그시’로, ‘나이가 [지그시] 들었다’의 소리는 ‘지긋이’로 적어야 하니까요. ‘깨끗이’를 [깨끄시]로 읽어도 ‘깨끗하다’의 ‘깨끗’을 살려 적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소리보다 뜻과 관련된 말을 먼저 찾으면 받침이 보입니다.
‘지그시 바라보다’도 헷갈린다면
학생들이 자주 가져오는 문장은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입니다. 국립국어원은 이 문장에서 슬며시 힘을 주는 모양을 뜻한다면 ‘지그시’로 쓰는 것이 바르다고 안내합니다. 눈에 힘을 주어 조용히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린다면 ‘지그시’가 어울립니다. 나이가 듬직하다거나 끈기 있게 앉아 있다는 뜻의 ‘지긋이’를 소리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넣지는 않습니다.
교실에서는 두 장면을 짧게 바꿔 말하게 합니다. ‘눈을 지그시 감다’는 ‘슬며시 힘을 주어 감다’로, ‘나이가 지긋이 들다’는 ‘나이가 지긋하다’로요. ‘지긋이 앉아 있다’도 ‘지긋하게 앉아 있다’로 바꿔 보면 끈기의 뜻이 드러납니다. 글자 한 획을 외우는 것보다 문장이 가리키는 모습을 기억하는 편이 오래갑니다. 같은 소리로 읽히는 두 말이 서로 다른 장면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 우리말의 재미이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