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저녁 산책을 나갔다가 집 앞 가게 불이 벌써 켜진 걸 봤어요. 아직 저녁 먹을 시간도 아닌 것 같았는데, 11월에는 해가 부쩍 빨리 지더라고요. 그날 떠오른 시가 나태주의 「11월」이었습니다.
이 시를 찾는 분들 중에는 쓸쓸한 계절에 어울리는 문장을 기대하는 분도 있을 거예요. 실제로 시에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마음과 추워진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끝에 다다르면 시선이 조금 달라집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곁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 생각하게 하거든요.
먼저 11월이라는 시간을 떠올려 보기
11월은 새해 계획을 세우기엔 이르고, 한 해가 다 끝났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달입니다. 달력에는 아직 날짜가 남아 있는데 마음은 벌써 연말 쪽으로 기울죠. 그래서 올해 하려던 일을 떠올리면 아쉬움이 생기고, 지나온 날을 생각하면 쉽게 버릴 수 없는 기억도 따라옵니다.
나태주의 「11월」은 바로 그 사이에 선 마음으로 읽힙니다. 앞으로 계속 가자니 망설여지고, 그렇다고 여기까지 온 시간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는 상태 말이에요. 시험을 준비한 사람이라면 쌓아 둔 공부가, 이직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지금껏 다닌 직장에서 보낸 시간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시가 짧아도 각자의 사정이 들어갈 자리는 넉넉합니다.
읽을 때는 올해의 큰 사건부터 찾지 않아도 됩니다. 1월에는 자주 만났지만 요즘 연락이 뜸한 친구, 여름부터 미뤄 둔 약속처럼 작은 일 하나를 떠올려도 충분해요. 내 시간을 대입하고 나면 시 속의 망설임이 훨씬 가까워집니다.
서리 맞은 장미가 눈에 남는 이유
이 시에는 추위 속에 놓인 어린 장미가 등장합니다. 장미라고 하면 따뜻한 계절에 활짝 핀 꽃을 먼저 떠올리기 쉬운데, 여기서는 서리를 맞은 모습입니다. 화려한 장면이 아니라 조금 위태롭고도 눈길이 가는 장면이죠.
저는 이 장미를 읽을 때마다 늦가을 화단 앞에서 걸음을 늦추게 됩니다. 꽃이 아직 피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갑지만, 찬 공기를 견디는 모습 때문에 오래 바라보게 되거든요. 누군가를 보고 느끼는 마음도 비슷할 때가 있습니다. 늘 씩씩해 보이던 사람이 지쳐 있을 때, 그제야 안부를 묻게 되는 식으로요.
물론 장미가 반드시 특정한 사람을 뜻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소중하지만 돌보지 못한 관계로 읽을 수도 있고, 추운 시기를 지나는 자기 자신으로 읽을 수도 있어요. 지금 내 눈에 어떤 장면이 먼저 들어오는지 살피는 편이 정해진 해석을 외우는 것보다 재미있습니다.
짧아진 낮 다음에 오는 마음 읽기
11월에는 낮이 짧아졌다는 사실을 생활 속에서 바로 느낍니다. 퇴근길이 어두워지고, 주말에 늦게 나서면 금세 저녁이 오죠. 시에서도 짧아진 낮은 배경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줄어든다는 감각이 사람을 향한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이 대목이 저는 특히 좋습니다. 아쉬운 시간을 되돌릴 방법을 찾기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게 해서요. 예를 들어 부모님께 전화를 걸거나, 바빠서 미뤄 둔 친구와의 식사 날짜를 잡는 일입니다. 거창한 다짐은 아니지만 실제로 하루를 다르게 만들 수 있는 행동이죠.
그렇다고 시가 모든 관계를 붙잡으라고 말하는 것처럼 읽을 필요는 없어요.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일이 부담스럽다면, 함께 사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거나 지친 자신을 일찍 쉬게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사랑의 대상과 방식은 읽는 사람의 생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시를 오래 남기는 읽기 습관
처음 읽을 때는 뜻을 한 번에 풀려고 애쓰지 말고, 눈에 남은 장면 하나를 골라 보세요. 지나온 시간인지, 서리 맞은 장미인지, 빨리 어두워지는 저녁인지에 따라 시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같은 사람이 읽어도 올해와 내년에 고르는 장면이 달라질 수 있고요.
그다음에는 그 장면 옆에 내 생활의 사례를 한 줄만 적어 보는 겁니다. ‘요즘 퇴근하면 바로 어두워진다’처럼 평범해도 괜찮아요. 시의 말과 내 하루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기면, 좋은 문장을 읽고 잊어버리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원문을 읽고 싶다면 나태주의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서 「11월」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책으로 읽으면 화면에서 짧은 문장만 볼 때와 달리, 시 전체의 흐름과 여백을 천천히 따라갈 수 있어요. 특히 끝부분을 읽은 뒤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처음의 망설임도 조금 다른 마음으로 느껴집니다.
11월은 아쉬운 일을 세기 쉬운 달이지만, 아직 남은 날도 분명히 있는 달입니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저는 못 한 일을 하나 더 적기보다 지금 떠오르는 사람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어집니다. 짧아지는 낮을 붙잡을 수는 없어도, 오늘의 저녁을 다정하게 쓰는 일은 할 수 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