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찾아간 집에서 조리대 위 물건을 모두 치웠다가 사흘 뒤 다시 봤습니다. 전기밥솥 옆에 가위와 집게가 돌아와 있더군요. 처음엔 어수선해 보였지만, 그 자리가 싱크대에서 꺼낸 식재료를 손질하는 곳이었습니다. 자주 쓰는 도구가 손 닿는 곳으로 돌아온 거죠. 주방 수납은 빈 조리대를 만드는 일보다, 물건이 돌아갈 자리를 동선에 맞춰 주는 일이 먼저입니다.
주방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순서부터 보세요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 싱크대에서 씻고, 조리대에서 썰어 가열대에 올립니다. 식사가 끝나면 그릇은 싱크대로 돌아오고요. 이 순서를 따라가며 하루만 관찰하면 수납장의 용도가 조금씩 보입니다. 도마는 씻은 재료를 내려놓는 곳 가까이, 팬은 가열대 가까이 두는 식입니다. 남의 집에서 편했던 배치를 그대로 옮기면 우리 집에서는 매번 두세 걸음을 더 걷게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문을 열었을 때 바로 잡히는 높이는 아껴 써야 합니다. 서서 일할 때 허리를 깊이 굽히거나 발판을 꺼내지 않아도 되는 칸에는 매일 쓰는 그릇과 도구를 놓으세요. 계절 접시나 손님용 컵은 위쪽이나 아래쪽 칸으로 보내도 생활에 큰 지장이 없습니다. 수납장의 칸마다 크기가 같아 보여도 쓰기 편한 정도는 다릅니다.
한 집에서는 냄비를 크기순으로 가지런히 포개 두었는데, 매일 쓰는 작은 냄비가 맨 아래에 있었습니다. 저녁마다 큰 냄비 두 개를 들어 올려야 했죠. 작은 냄비를 앞쪽으로 옮기고 큰 냄비를 뒤에 두자 수납장 안은 조금 덜 반듯해졌지만, 요리할 때 꺼내는 동작은 훨씬 간단해졌습니다. 보기 좋은 순서보다 꺼내는 횟수를 기준으로 삼는 편이 오래갑니다.
조리대에는 매일 쓰는 것만 남기세요
조리대가 좁은 집일수록 물건을 전부 감추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매일 쓰는 소금과 식용유까지 깊은 장에 넣으면 요리할 때마다 꺼냈다가 제자리에 놓는 일이 번거롭습니다. 그러면 결국 조리대 한쪽에 다시 모입니다. 저는 조리대 위 물건을 볼 때 일주일 동안 몇 번 손이 갔는지 묻습니다. 매일 쓰는 것이라면 남겨 두되, 손질하거나 그릇을 내려놓을 빈 면은 확보합니다.
가열대 옆에는 열과 기름이 튑니다. 이 자리에 양념병을 빽빽하게 늘어놓으면 병 하나를 꺼낼 때마다 주변을 닦아야 합니다. 자주 쓰는 병 두세 개만 한데 두고, 나머지는 가까운 서랍이나 장으로 옮기는 쪽이 관리하기 쉽습니다. 쟁반 하나에 모두 올려두는 방식도 괜찮지만, 쟁반 바닥까지 닦을 수 있을 만큼만 올려야 합니다. 수납도 청소할 때 들어 드는 무게를 생각해야 하거든요.
싱크대 주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세미와 세제에 물이 닿는 건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때 작은 선반을 여러 개 들이는 것보다 물이 고이지 않는 자리 하나를 정하는 편이 낫습니다. 물기 닦는 시간이 늘어나는 수납 도구는 주방을 더 편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서랍과 하부장은 물건의 크기에 맞춰 나누세요
서랍 안에 칸막이를 사기 전, 먼저 물건을 꺼내 종류별로 놓아봅니다. 수저, 조리도구, 비닐류처럼 쓰는 순간이 비슷한 것끼리 모으면 필요한 칸의 폭이 보입니다. 가위 한 자루 때문에 넓은 칸을 통째로 비워야 한다면 배치를 바꾸거나 작은 통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서랍 전체를 촘촘히 채우는 제품을 사면 길이가 긴 집게 하나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지기도 합니다.
깊은 하부장에는 앞줄과 뒷줄의 차이가 큽니다. 뒤에 둔 물건은 앞의 것을 꺼내야 보이니까요. 매일 쓰는 팬과 냄비는 앞에, 한 달에 한두 번 쓰는 찜기나 큰 냄비는 뒤에 두는 식으로 나눕니다. 같은 크기의 통을 맞춰 넣는다고 이 문제가 저절로 풀리지는 않습니다. 통을 꺼낼 때 손잡이가 잡히는지, 위쪽에 손이 들어갈 여유가 있는지도 봐야 합니다.
싱크대 아래는 배관 때문에 반듯한 상자 하나로 채우기 어렵습니다. 배관과 문 경첩이 차지하는 공간을 먼저 확인하고, 자주 꺼내는 물건을 문 쪽에 둡니다. 세제나 쓰레기봉투를 둘 때도 한 손으로 꺼낼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문을 열고 상자를 꺼낸 뒤 뚜껑까지 열어야 봉투 한 장을 집을 수 있다면, 그 상자는 이 자리와 맞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수납용품을 사기 전 빈자리를 만들어 보세요
주방 수납 상담을 가면 바구니부터 장바구니에 담아 둔 분을 자주 만납니다. 마음은 이해합니다. 물건마다 통을 마련하면 금방 단정해질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수납용품은 물건을 줄여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통 벽과 손잡이가 자리를 차지해서 이미 꽉 찬 장은 더 답답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유통기한이 지난 식재료, 뚜껑이 맞지 않는 용기, 몇 년째 쓰지 않은 사은품 컵을 꺼내보세요. 그런 다음 자주 쓰는 물건을 제자리에 놓고 남은 공간의 폭과 깊이, 문을 닫을 때 걸리는 부분을 확인합니다. 수납용품이 필요하다면 이때 고르는 게 좋습니다. 특히 선반 안에 넣을 제품은 선반 치수만 재지 말고, 문을 연 상태에서 실제로 물건을 넣고 빼는 입구도 확인해야 합니다.
예산이 적다면 저는 눈에 띄는 바구니를 여러 개 맞추기보다, 매일 여닫는 서랍 하나를 편하게 만드는 데 먼저 씁니다. 서랍 하나의 불편은 하루에도 여러 번 반복되지만, 높은 장 안의 모양은 자주 볼 일이 없으니까요. 한 번에 주방 전체를 바꾸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장 자주 멈칫하는 자리 한 곳을 고치고 며칠 살아보면, 다음에 손볼 곳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살기 좋은 주방은 늘 아무것도 없는 모습일 필요가 없습니다. 자주 쓰는 가위가 손 가까이에 있고, 쓰고 난 뒤 돌아갈 자리가 분명하면 됩니다. 가족이 바쁜 저녁에도 그 자리에 다시 넣을 수 있다면, 그 배치는 오래 버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