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를 처음부터 다시 틀었다. 예전엔 데쿠가 언제 강해지는지만 기다렸는데, 이번엔 화면 구석에서 친구들이 서로를 살피는 장면에 자꾸 눈이 갔다. 배틀 장면을 보려고 시작했다가 사람 관계 때문에 다음 화를 누르게 되는 작품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뒤늦게 시작하려는 사람도 있을 테니, 여기서는 이야기의 큰 전환점이나 승패는 건드리지 않겠다.
데쿠의 출발점이 아직도 마음에 남는 이유
이 세계에서는 인구의 약 80%가 초능력인 ‘개성’을 지녔다. 히어로도 정식 직업이다. 그런데 히어로를 꿈꾸는 미도리야 이즈쿠, 그러니까 데쿠에게는 개성이 없다. 설정만 들으면 익숙한 성장물 같지만, 초반의 데쿠는 자신의 꿈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아이에 가깝다. 그래서 누군가를 돕고 싶어 몸이 먼저 움직이는 순간이 더 크게 다가온다.
솔직히 데쿠의 울먹임이나 혼잣말은 취향을 탈 수 있다. 나도 처음 볼 때는 대사가 조금 길다고 느꼈다. 다시 보니 그 습관이 남들보다 늦게 출발한 사람이 얼마나 오래 관찰하고 준비했는지 보여준다. 노트에 히어로의 능력을 적고, 움직임을 분석하고, 어떻게든 배워 보려는 태도가 있다. 작품이 데쿠를 응원하게 만드는 방식은 ‘사실은 천재였다’는 식의 깜짝 공개보다 그 꾸준함에 가깝다.
올마이트와 데쿠의 관계도 좋다. 동경의 대상과 팬으로 시작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에는 힘을 갖는다는 게 무엇을 책임지는 일인지 묻는 순간이 섞여 있다. 화려한 등장 장면만 기억했다면, 둘이 서로의 말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봐도 재미있다. 초반부터 쌓인 감정이 뒤로 갈수록 장면의 무게를 바꾼다.
유에이 고교는 주인공 한 명의 무대가 아니다
유에이 고교에 들어가면 이야기가 확 넓어진다. 반 친구들은 능력의 모양만 다른 게 아니라, 히어로가 되고 싶은 이유와 불안한 지점도 제각각이다. 바쿠고는 데쿠와 가까운 만큼 둘 사이의 감정이 단순하지 않고, 토도로키는 뛰어난 실력과 별개로 스스로 넘어야 할 벽이 있다. 우라라카가 품은 현실적인 목표도 학교 이야기에 다른 온도를 더한다.
내가 좋아하는 건 누구 하나가 등장하면 그 인물만 빛나는 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훈련에서는 능력이 강한 학생도 팀의 판단이 어긋나면 흔들리고, 평소 눈에 덜 띄던 학생이 예상 밖의 몫을 해낸다. 같은 장면을 다시 보면 처음엔 스쳐 지나갔던 반 친구의 반응이 보인다. 그래서 재시청할 때 응원하는 사람이 늘었다.
물론 인물이 많아서 초반엔 이름과 개성을 외우기 바쁠 수 있다. 나 역시 몇몇 학생은 한참 뒤에야 구분했다. 그럴 땐 전부 기억하려고 애쓸 필요 없이, 지금 화면에 있는 학생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누구와 손을 맞추는지만 따라가도 충분하다. 관계가 쌓이면 이름은 자연스럽게 익숙해진다.
경기보다 재미있는 건 각자의 선택
히어로 학교라는 설정 덕분에 수업, 훈련, 대회마다 볼거리가 달라진다. 특히 체육제는 능력을 겨루는 장면과 학생들의 개인적인 사정이 맞물려서 정주행 속도가 빨라지는 구간이다. 누가 이겼는지보다 왜 그런 방식으로 싸우는지를 보면 장면이 오래 남는다. 기술 이름을 외우지 않아도 그 선택의 의미는 따라갈 수 있다.
액션도 힘의 크기만 비교하는 방식이 아니다. 어떤 능력은 가까이 붙어야 유리하고, 어떤 능력은 지형이나 동료와의 호흡에 따라 쓸모가 달라진다. 데쿠가 상대를 관찰하며 방법을 찾는 장면을 좋아한다면 이 부분이 꽤 잘 맞을 거다. 반대로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시원하게 끝나는 전개를 좋아한다면, 작전과 감정 설명이 길게 느껴질 수 있다.
중반 이후에는 학교의 밝은 공기와 바깥세상의 긴장이 더 자주 부딪힌다. 여기서부터는 작품을 보며 기대하는 재미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가벼운 학원물 분위기가 가장 좋았던 사람에겐 무겁고, 히어로 사회의 그늘이 궁금했던 사람에겐 이야기가 더 깊어지는 구간이다. 내 취향은 후자에 가깝지만, 밝은 일상 편이 드물어질 때 아쉬웠던 마음도 이해된다.
몰아볼 때는 속도보다 호흡이 중요했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는 다음 화를 누르게 만드는 끝맺음이 많다. 그래도 계속 달리다 보면 큰 사건과 감정적인 장면이 연달아 쌓여 조금 지칠 수 있다. 나는 학교 행사나 훈련처럼 분위기가 바뀌는 구간에서 잠깐 쉬었다. 그러고 돌아오니 앞서 지나간 작은 대화가 더 선명하게 기억났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초반 몇 화에서 데쿠와 올마이트의 관계가 마음에 드는지 확인하는 게 좋겠다. 거기서 끌린다면 유에이 고교의 반 친구들이 더해지면서 즐길 거리가 늘어난다. 반면 울컥하는 대사와 진지한 독백이 영 맞지 않는다면, 뒤로 갈수록 그런 감정 표현이 사라지는 작품은 아니다. 그 점까지 포함해 취향이 갈릴 수 있다.
다시 보며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내가 기다리는 장면이었다. 첫 감상 때는 멋진 필살기였고, 이번엔 누군가 겁을 내면서도 다른 사람 곁에 남는 순간이었다. 히어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못지않게 왜 손을 내미는지 계속 묻는 이야기라서, 시간이 지나도 응원할 얼굴이 새로 보이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