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난영화 추천을 묻길래 다시 골라봤다

한국 재난영화 추천을 묻길래 다시 골라봤다

얼마 전 친구가 한국 재난영화 추천을 부탁하면서 조건을 하나 붙였다. ‘사람들이 계속 소리만 지르는 영화는 빼줘.’ 재난영화라고 다 같은 긴장감을 주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숨 돌릴 틈 없는 추격을 원하고, 누군가는 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사람의 선택을 오래 기억한다. 그래서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는 다섯 편을 다시 추렸다. 아래에는 주요 반전이나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가 없다.

한순간도 긴장을 놓기 싫다면 부산행

달리는 열차 안에서 감염이 퍼진다. <부산행>의 강점은 이 간단한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속도다. 객실과 객실 사이의 짧은 거리마저 위험해지니, 인물들이 문 하나를 열 때도 몸이 먼저 긴장한다. 좀비영화를 평소 즐기지 않아도 따라가기 쉬운 편이다. 무엇이 벌어졌는지 설명하는 데 시간을 오래 쓰지 않고, 당장 눈앞의 사람을 구할지 지나칠지 선택하게 만든다.

다만 감염 장면과 인파가 몰리는 장면은 꽤 강하다. 잔혹한 화면에 민감하다면 편한 저녁용 영화는 아니다. 반대로 빠른 전개와 선명한 감정선을 좋아한다면 첫 편으로 권하고 싶다. 몇몇 인물의 행동은 답답할 수 있는데, 그 답답함까지 이 영화가 노리는 긴장의 일부다.

큰 폭발보다 좁은 공간이 무섭다면 터널

<터널>은 무너진 터널 안에 갇힌 사람과 바깥에서 그를 구하려는 사람들을 번갈아 보여준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재난보다 물과 배터리가 줄어드는 시간이 더 무섭다. 구조가 늦어질수록 기다림이 어떻게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도 차분히 쌓아 간다. 화려한 장면이 잦지 않은데도 긴장감이 오래 유지되는 이유다.

이 영화는 구조 작업을 둘러싼 언론과 여론의 태도도 보여준다.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빠른 액션을 기대하면 중간이 느리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늘어나는지 체감하고 싶다면, 오히려 그 느린 구간이 영화의 중심이다. <부산행>을 보고 숨이 너무 찼다면 다음에는 <터널>이 잘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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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영화의 무게가 부담스럽다면 엑시트와 싱크홀

가볍게 시작하고 싶을 때는 <엑시트>가 좋다. 유독가스가 퍼진 도심에서 건물 위로 올라가며 탈출구를 찾는 이야기다. 주인공의 클라이밍 경험이 위기에서 쓰이지만, 모든 일을 척척 해결하는 영웅담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허둥대고 겁먹는 순간이 있어서 몸을 쓰는 장면에도 웃음이 붙는다. 높은 곳에서 움직이는 장면이 많으니 고소공포에 민감하다면 참고할 만하다.

<싱크홀>은 어렵게 마련한 집이 땅속으로 꺼지면서 시작한다. 재난에 이웃 간 소동과 생활형 코미디를 섞은 작품이라, 팽팽한 생존극을 기대하면 분위기가 생각보다 가볍다. 인물들이 티격태격하는 시간이 꽤 길고 이야기의 개연성도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도 무거운 소재를 부담 없이 보고 싶은 날에는 선택지가 된다. 둘 중 완성도와 탈출 장면의 쾌감을 우선한다면 나는 <엑시트>를 먼저 고르겠다.

사고 뒤에 남는 책임까지 보고 싶다면 판도라

<판도라>는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다룬다. 사고가 커지는 과정뿐 아니라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 가족,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의 시간을 함께 보여준다. 다른 네 편보다 감정의 무게가 크고, 재난을 개인의 순발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 또렷하다. 대사와 장면이 감정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편이라 절제된 연출을 선호한다면 과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오래 남는 건 거대한 시설의 모습보다 그 안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사람의 얼굴이다. 재난의 규모보다 그 위험을 누가 감당하는지가 궁금한 사람에게 맞는다. 가볍게 웃으며 볼 작품을 찾는 날보다는, 보고 난 뒤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는 날에 권한다.

처음 한 편만 고른다면 속도감은 <부산행>, 답답할 만큼 현실적인 기다림은 <터널>, 기분 좋은 탈출극은 <엑시트>다. 재난영화는 무엇이 무너지는지보다 그 순간 누구를 바라보게 만드는지에 따라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내 취향에는 위기 속 사람들의 표정이 오래 남는 <터널>이 자꾸 돌아보게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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