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오래된 영화를 다시 보다가 화면 속 그림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색이 없으니 배우의 얼굴뿐 아니라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 방 안의 빈자리까지 또렷하게 보이더군요. 신작 목록에서 흑백영화를 만나도 비슷한 기대가 생깁니다. 흑백은 옛날 영화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감독이 선택할 수 있는 표현 방식입니다.
흑백이면 오래된 영화일까요?
극장에서 흑백 화면을 보면 먼저 제작 연도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흑백영화라는 말은 화면의 색을 가리킬 뿐, 개봉 시기나 장르를 뜻하지 않습니다. 2018년 작품인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도 처음부터 흑백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흑백으로 찍었다고 해서 무성영화인 것도 아닙니다. <로마>에는 대사와 거리의 소리, 집 안의 생활 소음이 촘촘히 담겨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컬러 장면과 흑백 장면을 함께 사용합니다. 아이맥스에 따르면 일부 흑백 장면은 흑백 필름으로 촬영했습니다. 이렇게 한 작품 안에서도 색의 전환이 장면을 구분하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전부 흑백인지, 일부만 흑백인지’를 확인하면 화면이 바뀌는 순간을 조금 더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죠.
색이 사라지면 무엇이 더 보일까요?
컬러 화면에서는 빨간 옷이나 푸른 하늘이 시선을 먼저 잡아끕니다. 흑백 화면에서는 밝기 차이와 인물의 움직임이 그 역할을 맡습니다. 같은 방을 보여줘도 얼굴은 밝고 배경은 어둡게 두면 인물이 도드라지고, 반대로 인물을 그림자에 놓으면 표정을 읽기 어려워집니다. 흑백 촬영의 재미는 화면을 예쁘게 만드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관객의 눈이 어디에 머물지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큽니다.
<로마>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에 따르면 이 영화는 135분 길이의 흑백 작품이며 화면비는 2.39 대 1입니다. 넓은 화면에 인물 한 명만 붙들어 두기보다 주변 공간과 여러 사람의 움직임을 함께 담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클레오를 따라가면서도 집과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연스럽게 보게 됩니다. 조용한 장면이 길게 느껴질 수 있지만, 화면 가장자리에서 무엇이 움직이는지 보면 기다리는 시간이 달라집니다.
처음 볼 작품은 어떻게 고르면 좋을까요?
흑백영화가 낯설다면 작품의 유명세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의 속도를 먼저 생각하는 편이 좋습니다. 대사와 음악을 따라가고 싶다면 2011년 작품 <아티스트>가 입문작이 될 수 있습니다.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가 소개하는 상영 시간은 100분입니다. 무성영화 형식을 활용해 표정과 몸짓, 음악으로 이야기를 전하므로 평소 보던 영화와 감각이 꽤 다릅니다.
생활 속 인물과 공간을 천천히 지켜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로마>가 맞을 수 있습니다. 다만 사건이 빠르게 이어지는 영화를 기대한다면 135분이 길게 느껴질 수 있죠. 역사의 무게를 감당할 마음이 있다면 <쉰들러 리스트>도 있습니다. 미국영화연구소가 안내하는 상영 시간은 195분입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인 만큼 관람 시간뿐 아니라 내용의 강도도 생각하고 고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 가볍게 형식의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아티스트>
- 인물의 일상과 공간을 오래 바라보고 싶다면 <로마>
- 무거운 역사극에 집중할 수 있다면 <쉰들러 리스트>
상영 정보에서 무엇을 확인할까요?
신작이나 재개봉작을 예매할 때는 흑백이라는 소개 문구만 보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작품 전체가 흑백인지, 컬러와 번갈아 나오는지에 따라 관람 경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제목이라도 특별판이나 재개봉판이 소개되는 경우에는 어떤 버전을 상영하는지도 살펴볼 만합니다. 특히 오래된 영화를 처음 본다면 상영 시간과 자막 유무를 함께 확인하는 게 편합니다.
화면이 어둡다고 느껴질 때도 흑백영화가 원래 흐릿한 작품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차이를 세심하게 만든 장면일 수 있고, 상영 환경이나 영상 상태가 인상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흑백영화를 볼 때 줄거리를 따라가다가도 한 번씩 인물 뒤의 공간을 바라봅니다. 색이 빠진 자리에 빛과 움직임이 어떻게 놓였는지 발견하는 순간이 오래 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