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 반대는 왜 일어났을까요?

1회
한글 창제 반대는 왜 일어났을까요?

수업에서 훈민정음 이야기를 꺼내면 학생들이 먼저 묻는 말이 있습니다. “백성이 글을 읽게 된다는데 왜 반대했어요?” 쉬운 글자가 생기면 모두 반겼을 것 같지요. 그런데 1444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와 동료 학자들은 세종에게 긴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걱정했는지 알려면 지금 우리가 아는 ‘한글’에서 잠시 눈을 떼고, 당시 조선에서 글이 어떤 자리를 차지했는지 봐야 합니다.

반대 상소는 글자가 만들어진 뒤에 나왔습니다

연도부터 짚어 두면 이야기가 선명해집니다. 세종이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를 만든 것은 1443년입니다. 최만리 등이 상소한 날은 이듬해인 1444년 음력 2월 20일이고, 새 글자의 원리를 풀이한 책 『훈민정음』이 나온 것은 1446년입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의 전시 설명과 『세종실록』을 나란히 읽으면 ‘창제’, ‘반대 상소’, ‘해설서 간행’이 서로 다른 시점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한글 창제 반대’는 글자를 만들기 전부터 신하들이 한목소리로 막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기록으로 분명히 확인되는 것은 새 글자가 만들어진 뒤, 그 글자를 가르치고 책으로 펴내려는 움직임에 최만리 등이 반대한 일입니다. 당시 상소에는 오늘날 이름인 ‘한글’ 대신 ‘언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상소의 첫머리에서 그들은 새 글자를 만든 솜씨가 뛰어나다고 인정하면서도, 시행에는 의문이 있다고 말합니다.

왜 중국과 다른 글자를 걱정했을까요?

첫 번째 걱정은 외교와 문화 질서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와 관계를 맺고 한문을 공식 기록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최만리 등은 조선이 따로 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중국에 알려지면 비난을 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문자를 쓰는 주변 나라를 낮춰 보는 표현도 상소에 담겼습니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거북하지만, 그 표현 자체가 그들이 어떤 질서를 당연하게 여겼는지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우리말이 중국말과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말은 달랐고, 우리말을 적을 때는 한자를 빌린 이두 같은 방법에 기대야 했습니다. 한자를 충분히 배우지 못한 사람이 자기 뜻을 글로 옮기기에는 문턱이 높았지요. 같은 현실을 놓고도 세종은 ‘우리말에 맞는 글자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반대하는 신하들은 ‘기존의 한문 질서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훈민정음의 필요성이 생긴 자리와 반대가 나온 자리가 바로 여기서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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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글자가 학문을 밀어낼까 두려워했습니다

상소에는 교육에 관한 걱정도 길게 나옵니다. 최만리 등은 이두를 익히려는 사람은 먼저 한자를 배워야 하므로 자연스레 책과 학문을 접한다고 여겼습니다. 반면 언문만 알아도 관리의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젊은이들이 성리학 공부에 힘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이 지키려 한 ‘글’은 단순한 표기 수단이 아니라 관직에 나아가고 경전을 읽는 길이었습니다.

이 대목을 읽을 때 학생들에게 두 사람을 떠올려 보자고 합니다. 한 사람은 오랫동안 한문을 배워 문서를 읽는 관리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말을 글로 적고 싶지만 한자를 배우기 어려운 백성입니다. 관리에게 새 글자는 익숙한 공부와 업무 방식이 흔들리는 일일 수 있습니다. 백성에게는 지금껏 넘기 힘들었던 문턱이 낮아지는 일이지요. 반대 상소가 지식인의 우려를 자세히 전하는 만큼, 그 글 밖에 있던 사람의 처지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반대 이유를 기득권을 지키려는 마음 하나로만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소에는 형사 사건에서 억울함이 생기는 까닭은 글자를 몰라서만이 아니라 담당 관리가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글을 읽을 수 있게 하는 것만으로 모든 재판이 공정해지지는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다만 그것이 백성이 자신의 진술을 읽고 뜻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필요까지 없애지는 않습니다.

세종의 대답은 ‘백성이 쓰기 편한가’에 있었습니다

최만리 등은 새 글자를 널리 의논하지 않고 서둘러 가르치고 간행하려 한다며 절차도 문제 삼았습니다. 이미 쓰이던 운서의 소리를 손보려는 일에도 반대했습니다. 운서는 한자의 소리를 분류해 놓은 책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인물 설명은 이 상소를 이해할 때 세종의 한자음 정비 사업에 대한 반대도 함께 봐야 한다고 짚습니다. ‘새 글자가 싫었다’는 말만으로는 당시의 논쟁을 다 담기 어렵습니다.

『세종실록』에 남은 세종의 답은 방향이 또렷합니다. 신하들이 이두는 인정하면서 언문은 반대하자, 세종은 이두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고 만든 것 아니냐고 되묻습니다. 새 글자 역시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종은 운서를 바로잡는 일도 자신의 과제로 보았습니다. 신하들이 중요하게 여긴 기준이 기존 학문과 제도를 지키는 데 있었다면, 세종은 그 제도 안에서 뜻을 전하기 어려운 사람을 바라본 셈입니다.

상소가 올라온 뒤에도 훈민정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446년에는 글자의 목적과 원리를 밝힌 책이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그날부터 모든 공문서가 한글로 바뀐 것도 아닙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이 공식적인 나라의 글로 자리 잡은 시점을 1894년으로 설명합니다. 새 글자를 만드는 일과 사회가 그 글자를 받아들이는 일 사이에는 긴 시간이 놓여 있었습니다.

‘한글 창제 반대’라는 다섯 글자를 외우면 최만리의 이름만 남기 쉽습니다. 상소를 읽으면 한문을 배운 사람에게 열려 있던 길, 그 길에 들어서기 어려웠던 백성, 두 쪽을 바라보는 기준이 함께 보입니다. 저는 학생들이 세종의 업적을 기억할 때 그가 만든 글자의 모양만큼, 누구의 말을 글로 남기려 했는지도 떠올렸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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