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산에 갔을 때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건 유명한 풍경보다 읍내의 평범한 길이었다.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 장바구니를 든 사람의 발걸음, 오래된 집 앞에서 조금 느려지는 걸음. 괴산 여행 리스트를 적으며 하루에 많은 곳을 넣지 않은 이유도 그랬다. 서둘러 지나가면 이 동네의 조용한 표정을 놓칠 것 같았다.
괴산시장 옆 골목에서 시작한 아침
괴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괴산시장까지는 걸어서 약 10분이다. 터미널을 나와 곧장 다음 관광지로 이동하기보다 시장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읍내로15길 주변에는 장을 보러 나온 사람과 일을 시작하는 가게들이 있다. 여행자에게 특별한 장면이 아니어도, 누군가에게는 늘 다니는 아침 길이라는 점이 좋았다.
괴산군 문화관광 안내에 따르면 괴산 오일장은 매월 끝자리가 3일과 8일인 날에 선다. 장날은 농산물을 구경하고 사람들의 말을 듣는 재미가 있지만, 한적한 골목을 원한다면 장이 없는 평일이 더 맞을 수 있다. 나도 북적이는 시장을 한 바퀴 도는 것보다 주변 길을 느리게 걷는 시간이 좋았다. 문을 연 가게만 들르고, 닫힌 가게 앞에서는 괜히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시장은 누군가의 일터다. 사진을 찍을 때는 물건보다 사람 얼굴이 먼저 화면에 들어오지 않는지 살피게 된다. 길을 막지 않고 잠깐 비켜 서 있으면, 골목의 속도도 조금씩 보인다. 괴산에서는 그런 작은 주의가 여행을 더 편안하게 만들었다.
홍범식 고택에서는 시간을 조금 비워뒀다
시장에서 걸음을 이어 임꺽정로의 홍범식 고택으로 향했다. 괴산군 문화관광은 이 집을 홍범식 선생의 고택이자 괴산의 3·1만세시위를 준비한 장소로 소개한다. 설명을 읽고 나니 오래된 건물을 보러 왔다는 가벼운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집의 생김새를 둘러보는 일과 그곳에 남은 시간을 생각하는 일 사이에서 한동안 천천히 걸었다.
고택을 볼 때는 문턱과 마루, 안채와 사랑채가 놓인 방향에 눈이 간다. 큰 규모의 관광지처럼 계속 이동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한 자리에 서서 집을 바라보다가, 다시 바깥 골목으로 나오면 지금의 괴산읍이 이어진다. 오래된 공간과 오늘의 생활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셈이다.
다만 고택에서는 프로그램이 열리기도 한다. 늘 조용할 거라고 기대하기보다 방문 전에 괴산군의 행사 안내를 확인하는 편이 좋겠다. 사람이 적은 시간을 찾는 여행이라면 일정표의 빈칸 하나가 꽤 중요하다.
제월대에선 목적지보다 가는 길이 좋았다
읍내에서 조금 벗어나 제월리의 고산정과 제월대로 향했다. 고산정은 정자이고, 제월대는 그 곁의 바위 지형이다. 두 이름을 함께 기억해 두면 길을 찾을 때 편하다. 괴산군의 관광 자료에도 ‘괴산 고산정 및 제월대’로 실려 있다.
이곳에서는 도착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잠시 서서 주변을 보고,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이름난 전망을 몇 장 찍고 돌아서는 여행보다 이런 시간이 내게는 오래 남는다. 사실 조용한 곳은 볼거리가 부족해서 조용한 게 아니다. 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머물 이유가 있는 곳도 있다.
제월대 주변은 읍내 골목과 달리 발밑을 살피며 걷는 편이 좋다. 비 온 뒤 바위나 흙길이 젖어 있다면 무리해서 가까이 가지 않아도 된다. 마을 쪽 길에서는 농가 출입로를 막지 않고, 사유지처럼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조용한 장소를 좋아할수록 그 조용함을 지키는 방식도 생각하게 된다.
목도시장에서는 장날과 평일의 얼굴이 달랐다
시간이 더 있다면 불정면 목도리까지 가볼 만하다. 괴산읍에서 걸어 이어지는 코스는 아니어서 차량으로 이동하는 편이 수월하다. 목도시장은 끝자리가 4일과 9일인 날에 오일장이 선다. 장날에는 물건을 고르는 사람들 사이를 걷는 재미가 있고, 평일에는 시장을 둘러싼 동네 길에 시선이 간다. 어느 쪽이 좋은지는 내가 보고 싶은 괴산의 모습에 달려 있다.
목도양조장도 이 동네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다. 괴산군이 소개하는 목도 여행 동선에는 시장과 양조장, 빵집, 사진관이 함께 나온다. 그래서 목도에서는 한 건물만 보고 돌아오기보다 주변 골목을 조금 더 걸었다. 오래된 간판과 지금도 쓰이는 가게가 나란히 있는 길은 특별히 꾸미지 않아도 이야기가 된다. 양조장은 운영 중인 공간이니 내부 방문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바깥에서 마을 풍경의 일부로 바라봤다.
하루에 괴산읍, 제월대, 목도를 모두 넣을 수는 있다. 그래도 괴산 여행 리스트에 꼭 빈 시간을 남겨두고 싶다. 시장에서 오래 머물렀다면 다른 한 곳은 다음으로 미뤄도 된다. 괴산의 좋은 기억은 방문한 장소의 개수보다, 아무 일 없는 골목을 편하게 걸었던 시간에 더 가까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