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 한국시리즈 기록표를 넘기다가 2004년 현대의 우승 전적에서 손이 멈췄다. 4승 3무 2패. 우승에 필요한 승리는 네 번인데 경기는 아홉 번이나 했다. 한국시리즈 무승부는 전적표에 작은 숫자 하나를 더하지만, 그날 던진 공과 다음 경기를 준비할 시간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무승부는 승수에 더해지지 않는다
한국시리즈는 먼저 4승을 거두는 팀이 우승한다. 따라서 무승부는 양 팀 어느 쪽의 승리도 아니며, 시리즈는 계속된다. 이를테면 3승 2패인 팀이 다음 경기를 비기면 4승에 다가선 것이 아니라 3승 1무 2패가 된다. 전적만 보면 제자리인 듯하지만 선수들은 한 경기를 온전히 치른 뒤다.
2026년 KBO 포스트시즌 운영 안내에 따르면 연장전은 최대 15회다. 15회가 끝나도 동점이면 무승부로 기록한다. 한국시리즈에서 무승부가 나오면 예정된 시리즈 최종전 뒤에 그 경기가 열렸던 구장에서 추가 경기를 편성한다. 무승부가 두 경기 이상이면 하루의 이동일을 둔다는 규정도 있다. 이미 치른 경기를 없던 일로 하고 처음부터 다시 하는 방식이 아니라, 네 번째 승리를 가릴 경기가 하나 늘어나는 셈이다.
비로 경기가 중단되는 상황과도 구별해야 한다. 2026년 포스트시즌에는 강우콜드와 노게임 대신 서스펜디드 규정이 적용된다. 15회까지 치르고도 점수가 같아 끝난 무승부와, 중단된 지점부터 이어 치르는 경기는 기록표의 모습부터 다르다.
1993년의 2대2에는 투구 수 181개가 있다
무승부의 무게가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경기는 1993년 해태와 삼성의 3차전이다. 두 팀은 앞선 두 경기에서 1승씩 나눠 가졌고, 대구에서 열린 3차전도 연장 15회 끝에 2대2로 끝났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삼성의 신인 선발 박충식은 혼자 15이닝을 던져 2실점했다. 투구 수는 181개였다.
점수의 흐름도 팽팽했다. 삼성이 2회 먼저 득점하자 해태가 3회 따라붙었다. 해태는 6회 홍현우의 솔로 홈런으로 앞섰지만, 삼성은 같은 회 이종두의 적시 2루타로 다시 동점을 만들었다. 그 뒤 15회까지 어느 쪽도 결승점을 얻지 못했다. 전적은 1승 1무 1패가 됐고, 박충식의 호투에는 승리 투수 기록이 붙지 않았다.
이 경기를 단순히 ‘승자 없는 경기’라고 부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성은 한 명의 투수로 긴 이닝을 버텼고, 해태는 여러 투수를 이어 붙여 동점을 지켰다. 다음 날 선발과 불펜을 어떻게 쓸지는 전날의 15이닝을 빼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승부는 시리즈의 승수는 바꾸지 않았지만, 다음 경기의 출발 조건은 바꿨다.
2004년에는 세 번 비겨 아홉 번째 경기까지 갔다
2004년 현대와 삼성의 시리즈는 무승부가 일정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보여준다. 2차전은 8대8, 4차전은 0대0, 7차전은 6대6으로 끝났다. 같은 무승부라도 장면은 전혀 달랐다. 2차전은 점수를 주고받는 타격전이었고, 4차전은 한 점도 내주지 않는 투수전이었다.
특히 4차전에서 삼성 선발 배영수는 10이닝 동안 안타를 하나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팀도 득점하지 못했다. 경기는 연장 12회까지 0대0이었고, 배영수는 11회 마운드를 넘겼다. 공식 노히트노런이나 승리 투수 기록은 얻지 못했다. ‘10이닝 무피안타’라는 숫자만 읽으면 압도적인 승리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 경기의 끝은 무승부였다.
당시에는 경기 시작 후 4시간이 지나면 새 이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규정도 적용됐다. 지금의 15회 제한을 2004년 경기에 그대로 대입하면 흐름을 잘못 읽게 된다. 세 번의 무승부 끝에 현대는 9차전에서 삼성을 꺾어 4승 3무 2패로 우승했다. 일곱 번째 경기에서 끝날 수도 있었던 시리즈가 아홉 번째 경기까지 이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두 팀이 치른 접전의 크기를 말해준다.
점수 옆에 이닝과 다음 선발을 함께 적는다
무승부를 본 뒤에는 전적표보다 경기 내용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몇 회에 동점이 됐는지, 선발이 몇 이닝을 책임졌는지, 불펜이 몇 명 나왔는지에 따라 다음 경기의 선택지가 달라진다. 2006년 삼성과 한화의 5차전도 15회까지 1대1이었다. 삼성은 투수 9명, 한화는 5명을 기용했고, 경기 시간은 5시간 15분이었다. 스코어는 한 줄이지만 벤치가 계산해야 할 것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물론 긴 무승부가 반드시 어느 팀에 유리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선발을 오래 쓴 팀과 불펜을 많이 쓴 팀은 서로 다른 부담을 안고 다음 경기에 들어간다. 그래서 나는 한국시리즈 기록에서 ‘무’가 보이면 먼저 그 경기의 이닝과 투수 교체를 찾는다. 승수는 그대로여도, 그 사이에 시리즈의 리듬은 이미 한 번 움직였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