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봉산에 새긴 세 유산

위봉산에 새긴 세 유산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서 동상면 수만리로 이어지는 위봉산 자락에는 성곽과 사찰, 폭포가 한 공간에 자리한다. 조선 왕실의 상징물을 지키기 위해 정비된 위봉산성, 봉황 설화와 불교문화의 흔적을 품은 위봉사, 깊은 계곡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위봉폭포다.

세 유산은 형태도 기능도 서로 다르다. 위봉산성은 방어와 피난을 위한 성곽이고, 위봉사는 신앙과 수행의 공간이며, 위봉폭포는 산지 지형과 물길이 빚어낸 자연경관이다. 그러나 이들을 함께 살펴보면 완주의 산과 계곡을 배경으로 왕실의 역사, 불교의 전통, 자연을 바라본 옛사람들의 기억이 겹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왕실의 상징을 지킨 위봉산성

위봉산성은 험준한 산세와 계곡을 둘러싼 포곡식 산성이다. 전체 둘레는 약 8.6㎞이며, 2006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산과 골짜기를 성벽 안으로 감싸는 구조를 통해 우리나라 산성의 축조 방식과 방어 체계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위봉산성은 오랫동안 1675년, 숙종 1년에 전라감사 권대재가 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전주 이씨 시조의 위패를 전쟁이나 변란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 전주는 조선 왕실의 본향이라는 상징성을 지녔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어진과 위패를 안전한 장소로 옮길 대비책이 필요했다.

다만 관련 문헌을 근거로 산성의 최초 축조 시기를 고려시대까지 올려보는 견해도 제기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처음 조성된 산성이 조선 숙종 때 왕실의 어진과 위패를 보호하는 공간으로 정비됐다. 정확한 초기 연혁에 관한 검토가 이어지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왕실 관련 피난처로 기능하도록 손질됐다는 점은 위봉산성의 핵심적인 역사적 성격을 보여준다.

1808년, 순조 8년에는 전라감사 이상황이 위봉산성을 개축한 기록도 남아 있다. 여러 시대에 걸친 정비 기록은 이 산성이 한 차례 만들어진 뒤 그대로 남은 시설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보수되고 기능을 이어온 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위봉산성을 마련한 목적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실제 상황 속에서 드러났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기 직전, 경기전에 있던 태조의 어진과 왕실 위패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이때 위봉산성이 피난처로 활용됐다. 약 200년 전 마련한 대비책이 역사적 위기 속에서 현실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산성에는 서문지와 동문지, 북문지를 비롯해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 왕래할 수 있도록 만든 암문지, 장수가 지휘하던 장대지, 총과 대포 등을 설치했던 포루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각 시설은 성곽이 출입을 통제하고 병력을 지휘하며 방어력을 확보하도록 구성됐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서문에는 무지개처럼 휜 홍예형 석문이 남아 있다. 다듬은 돌을 아치 형태로 정교하게 쌓은 문은 오랜 세월을 견딘 성벽과 함께 당시의 축성 기술을 드러낸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돌의 크기와 맞물림, 곡선을 이룬 출입구의 구조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서문 일원에는 야간 조명이 설치돼 해가 진 뒤에도 성곽의 윤곽을 살펴볼 수 있다. 조명이 비친 석문과 성벽에서는 낮과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며, 오래된 돌의 표면과 구조가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위봉산성은 현대 대중문화와도 접점을 만들었다. 2019년 BTS의 ‘2019 썸머 패키지 인 코리아’ 촬영지로 등장하면서 국내외 팬들에게 알려졌다. 왕실의 어진과 위패를 지키던 역사적 성곽이 현대 문화 콘텐츠의 배경으로 소개되며 새로운 관심을 받은 사례다.

봉황 설화를 간직한 위봉사

위봉산성 안쪽에는 오랜 불교 신앙과 수행의 전통을 이어온 위봉사가 있다. 사찰 이름에는 세 마리 봉황에 관한 설화가 전해진다. 1868년, 고종 5년에 보련이 작성한 ‘극락전중건기’에 따르면 고려 말 최용각이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세 마리 봉황이 절터를 에워싸고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봉황을 둘러싼다는 뜻에서 위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문헌에 기록된 창건 설화이며, 위봉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백제 무왕 5년인 604년에 서암대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서로 다른 창건 이야기는 사실관계를 구분해 볼 필요가 있지만, 동시에 이 사찰이 오랜 기간 지역의 기억과 신앙 속에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위봉사가 크게 발전한 시기로 전해지는 때는 고려 말이다. 1359년, 공민왕 8년에 나옹화상이 주변 산세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찰을 대대적으로 중창했다고 전한다. 당시 위봉사에는 건물 28동과 암자 10동이 있었다고 알려져, 상당한 규모를 갖춘 사찰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시대에도 중창과 보수가 계속됐다. 세조 때 포효대사가 작성한 ‘보광명전현판기’에는 사찰 건물이 32동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은 위봉사가 오랜 세월 일정한 규모와 역할을 유지하며 지역 불교문화의 중심 가운데 하나로 기능했음을 뒷받침한다.

근대에 들어선 위봉사의 위상이 더욱 뚜렷하게 확인된다. 1911년 위봉사는 선교31본산 가운데 하나로 지정돼 당시 전라북도 일원의 사찰 46곳을 관할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찰의 규모만으로는 쉽게 짐작하기 어렵지만, 당시 전북 불교계에서 차지했던 행정적·종교적 비중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여러 차례 화재를 겪으며 사찰 규모는 줄었다. 그럼에도 보광명전과 극락전, 관음전, 나한전, 삼성각 등 여러 전각이 남아 불교문화의 흐름을 전한다. 산자락에 배치된 전각들은 주변 숲과 어우러져 차분한 경관을 이루며, 방문객은 건물의 구조와 배치를 통해 사찰 공간의 성격을 살필 수 있다.

가장 주목되는 건물은 보물로 지정된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이다. 보광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목조건축물이다.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짜 올린 다포계 건축양식을 갖췄다. 건물의 구조와 장식에는 조선시대 목조건축의 기술과 표현 방식이 남아 있다.

조선 말기에 건립된 위봉사 요사는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이다. 평면이 ‘아’ 자를 닮은 독특한 형태로 구성돼 전통 사찰의 생활공간과 건축적 특징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법회와 예불을 위한 중심 전각뿐 아니라 승려들이 생활하던 공간까지 함께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찰 주변에는 삼층석탑과 승려의 사리를 모신 부도 등도 남아 있다. 전각과 석조유산을 함께 보면 위봉사가 여러 시대에 걸쳐 신앙과 수행의 장소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위봉사는 위봉산성 안에 자리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사찰은 성곽과 행궁을 둘러싼 역사적 공간의 한 부분을 이뤘다. 1894년 태조의 어진과 왕실 위패를 피난시킨 사건 역시 위봉산성과 위봉사 일대를 연결된 공간으로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위봉사는 오래된 사찰에 머물지 않고, 불교 신앙의 전통과 조선 왕실의 역사가 한 산자락에서 만나는 장소다.

광고

두 단으로 쏟아지는 위봉폭포

위봉산성 동문 방향에는 높이 약 60m의 2단 폭포인 위봉폭포가 자리한다. 예부터 완산팔경 가운데 하나로 꼽혔으며, 2021년에는 ‘완주 위봉폭포 일원’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명승에 지정됐다.

위봉폭포의 가치는 물줄기의 높이에만 있지 않다. 험준한 산세와 깊은 계곡, 절벽을 이룬 기암괴석, 울창한 숲이 폭포와 어우러져 하나의 경관을 만든다. 물은 높은 암벽을 따라 두 단계로 떨어지고, 주변의 바위와 수목은 계절과 날씨에 따라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비가 내린 뒤에는 수량이 늘어 물줄기가 한층 힘차게 쏟아진다. 계곡을 채우는 물소리와 절벽 아래로 흩어지는 물방울이 폭포의 규모를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 수량이 적을 때는 암벽의 형태와 층위, 주변 바위와 숲의 구성이 상대적으로 자세히 드러난다. 같은 장소가 물의 양에 따라 서로 다른 경관을 보여주는 셈이다.

위봉폭포는 위봉산성과 지형적으로도 연결된다. 위봉산성은 산과 계곡을 둘러싼 포곡식 산성이다. 산성 내부의 계곡과 주변 산지에서 모인 물은 낮은 지형을 따라 흐르다가 급경사를 만나 폭포를 이룬다. 따라서 두 유산은 단순히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산지 지형과 물길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폭포에는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권삼득의 이야기도 전한다. 완주 출신인 권삼득은 1771년에 태어나 1841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조선 후기 판소리 발전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위봉폭포에서 소리를 수련해 득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득음은 오랜 수련을 거쳐 자신만의 소리 세계를 완성하는 것을 뜻한다. 옛 명창들이 산속이나 폭포 아래에서 자연의 큰 소리를 들으며 수련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형태로 전해진다. 위봉폭포에서도 거센 물소리를 마주하며 목소리를 다듬었을 명창의 모습이 지역의 기억으로 이어져 왔다.

다만 권삼득의 득음 이야기는 전승되는 내용이므로 확인된 역사적 사실과 구분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오랫동안 남았다는 점은 위봉폭포가 경치를 감상하는 장소를 넘어 지역의 판소리와 예술적 기억이 깃든 공간으로 인식됐음을 보여준다.

산과 계곡이 연결한 세 유산

위봉산성, 위봉사, 위봉폭포는 각각 역사유적과 종교건축, 자연경관에 속한다. 위봉산성은 왕실의 어진과 위패를 보호하는 피난처로 활용된 성곽이며, 위봉사는 오랜 신앙과 수행의 전통을 이어온 사찰이다. 위봉폭포는 수려한 산지 경관과 판소리 명창의 전승을 함께 간직한 명승이다.

개별 유산의 성격은 다르지만 세 곳의 바탕에는 같은 자연환경이 놓여 있다. 험준한 산세와 계곡은 왕실의 상징물을 보호할 산성을 마련하는 조건이 됐다. 사찰은 그 산지 안에서 불교문화의 전통을 이어갔고, 계곡의 물은 급경사를 만나 폭포라는 자연경관을 만들었다.

같은 산과 물길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얻었다. 조선 왕실에는 위기를 대비한 보호 공간이었고, 승려와 신도에게는 신앙과 수행의 터전이었다. 경치를 찾은 사람들에게는 자연을 바라보는 장소였으며, 전승 속 명창에게는 소리를 닦는 수련 공간으로 기억됐다.

위봉 일대의 특별한 가치는 성곽과 사찰, 폭포가 따로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의 역사적·지리적 공간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있다. 자연환경은 산성의 입지를 결정했고 사찰이 자리할 배경이 됐으며, 사람들이 경관을 감상하고 예술적 의미를 발견하는 무대가 됐다.

문화유산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오래된 건축물이나 유적만 보는 데서 멈추지 않아야 한다. 유산이 놓인 산세와 계곡, 그곳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진 기억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봉산성의 성벽과 위봉사의 전각, 위봉폭포의 물길은 각각 다른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완주 위봉이라는 하나의 공간 안에서 맞닿아 있다.

광고

위봉에서 마주하는 시간의 층

위봉산성에서는 성벽과 홍예문을 통해 조선 왕실의 피난 계획과 당시 축성 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 성 안쪽의 위봉사에서는 보광명전을 비롯한 전각과 요사, 석탑과 부도를 통해 오랫동안 이어진 불교문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위봉폭포에서는 산지의 계곡과 급경사가 만들어낸 자연경관, 판소리 명창과 관련된 지역의 전승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돌의 질감, 숲속에 자리한 사찰의 전각,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는 각기 다른 장면을 이룬다. 현장에서는 역사유적과 종교 공간, 자연경관이 가까운 거리에서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한 장소에 축적된 여러 시대의 흔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왕의 초상화를 지키기 위해 정비된 성곽, 세 마리 봉황의 설화를 품은 사찰, 명창의 소리가 전해지는 폭포는 서로 다른 유산이다. 그러나 세 이야기를 떠받치는 기반은 모두 위봉의 산과 계곡이다. 완주 위봉산 자락은 자연이 역사의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들의 신앙과 방어, 예술의 기억을 함께 형성한 공간임을 보여준다.

위봉산에 새긴 세 유산
위봉산에 새긴 세 유산

댓글 0

평가를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

모두 ID로 로그인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