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가계부에 통장 잔액을 옮겨 적다가 퇴직연금은 언제 확인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매달 카드값은 몇 천 원까지 살피면서, 오래 쌓이는 돈은 퇴직할 때나 보는 셈이었죠. 퇴직연금도 가계부처럼 현재 금액과 흐름을 가끔 확인하면 막연함이 줄어듭니다.
1. 이번 달에는 잔고보다 계좌 종류를 먼저 적기
퇴직연금 화면을 열면 DB형, DC형, IRP라는 글자가 먼저 보입니다. 고용노동부 설명에 따르면 DB형은 퇴직할 때 받을 급여가 정해져 있고 회사가 적립금을 운용합니다. DC형은 회사가 낼 부담금이 정해져 있으며 근로자가 적립금을 운용합니다. IRP는 퇴직하면서 받은 급여를 모아 두거나 본인이 추가로 돈을 넣을 수 있는 개인형 계좌입니다.
가계부 한쪽에 ‘내 제도는 DC형, 현재 적립금 1,200만 원’처럼 한 줄만 써도 출발점이 생깁니다. DB형이라면 상품 수익률을 직접 고르기보다 예상 퇴직급여와 근속 기간을 확인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DC형이라면 회사가 납입한 금액, 내가 고른 상품, 운용 결과를 함께 봐야 합니다. 같은 퇴직연금이라도 확인할 항목이 다른 이유입니다.
2. DC형은 회사 납입액을 연간 숫자로 보기
DC형은 회사가 연간 임금총액의 12분의 1 이상을 부담금으로 납입하는 구조입니다. 예를 들어 해당 연도의 임금총액이 3,600만 원이라면 기본적으로 살펴볼 연간 부담금은 300만 원입니다. 다만 실제 산정에 들어가는 임금 항목이나 가입 기간에 따라 개인별 숫자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라면 월급의 12분의 1을 매달 똑같이 찍어 맞추지는 않겠습니다. 회사의 납입 주기가 매월일 수도, 연 1회 이상 정기 납입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연말이나 퇴직 시점에 납입 내역과 급여 명세를 나란히 놓고 금액을 비교하겠습니다. 상여금이나 수당이 있는 해라면 무엇이 임금총액에 포함됐는지도 확인할 만합니다. 숫자가 맞지 않아 보일 때는 인사 담당자에게 산정 기준을 묻는 편이 빠릅니다.
3. IRP 추가 납입은 남는 돈을 계산한 뒤에
IRP의 세액공제 이야기를 들으면 한도부터 채우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가계부에서는 순서가 반대입니다. 다음 달 카드값, 비상금, 1~2년 안에 쓸 이사비나 교육비를 먼저 적고 오래 묶어 둘 수 있는 금액을 찾습니다. 생활비가 빠듯한 달까지 억지로 납입하면, 절세보다 당장의 현금 부족이 더 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가령 매달 여유가 20만 원인데 비상금이 아직 없다면, 20만 원 전부를 IRP에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10만 원은 비상금으로, 10만 원은 IRP로 보내는 식으로 가계 사정에 맞출 수 있습니다. IRP에 월 10만 원씩 넣으면 연간 납입액은 120만 원입니다. 국세청 안내의 공제율 15%를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계산상 소득세 공제액은 18만 원이고, 12%를 적용하면 14만 4천 원입니다. 실제 공제액은 소득과 납부할 세금 등에 따라 달라집니다.
현재 국세청 안내상 연금계좌 세액공제 대상 납입한도는 연금저축만 보면 600만 원, 퇴직연금까지 합하면 900만 원입니다. 회사가 DC형 계좌에 넣는 부담금이나 퇴직하면서 옮긴 퇴직급여는 내가 추가 납입한 금액처럼 공제받는 대상이 아닙니다. 한도를 목표액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월 납입액을 정하는 기준으로 쓰는 게 편했습니다.
4. 수익률을 볼 때는 상품과 비용도 함께 보기
DC형이나 IRP를 직접 운용한다면 잔고가 늘었는지만 보면 놓치는 게 있습니다. 새로 들어온 돈 때문에 잔고가 늘었는지, 운용 수익이 났는지 구분해야 합니다. 계좌 화면에서 원금과 평가금액을 따로 적으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예를 들어 납입 원금이 1,000만 원이고 평가금액이 1,030만 원이라면 차이는 30만 원입니다. 이 숫자만으로 다른 상품보다 좋았다고 판단할 수는 없으니 운용 기간과 위험 수준도 함께 봅니다.
원리금보장 상품을 골랐다면 만기 뒤 돈이 어디에 놓이는지, 실적배당형 상품을 골랐다면 가격이 내려갈 때도 감당할 수 있는 비중인지 확인합니다. 수익률 표시 방식과 수수료도 금융회사별로 살펴볼 항목입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은 금융회사별 수익률과 연간 총비용 정보를 비교 공시합니다. 저는 가계부를 매일 쓰더라도 퇴직연금은 분기마다 한 번, 잔고·납입액·상품·비용 네 칸만 적는 정도가 부담 없었습니다.
퇴직연금은 당장 장을 볼 돈이 아니라서 확인을 미루기 쉽습니다. 그래도 어떤 계좌에 얼마가 들어왔고 어디에 놓여 있는지만 알아두면 다음 선택이 한결 차분해집니다. 오래 갈 돈일수록 거창한 결심보다 가끔 숫자를 들여다보는 습관이 제게는 더 잘 맞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