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업 시간에 ‘굳이’를 읽어 보라고 하면 아이들은 대개 [구지]라고 정확히 말합니다. 그런데 칠판에 적을 때는 ‘구지’가 맞는지 잠깐 망설이죠. 소리는 익숙한데 글자는 낯선 셈입니다. 이럴 때 저는 규칙부터 외우게 하지 않고, 뒤에 오는 소리가 앞의 소리를 어떻게 움직였는지부터 이야기합니다.
‘굳이’의 ㄷ은 왜 [ㅈ]이 될까요?
‘굳이’는 ‘굳-’에 ‘-이’가 붙은 말입니다. 천천히 발음해 보면 받침 ㄷ이 뒤의 ㅣ를 만나 [ㅈ]으로 바뀌어 [구지]가 됩니다. ‘밭이’도 [바치]로 읽습니다. 여기서는 ㅌ이 [ㅊ]으로 바뀌었죠. 글자만 보고 ‘ㄷ은 ㅈ, ㅌ은 ㅊ’이라고 외우면 금세 헷갈리지만, 두 소리 뒤에 무엇이 왔는지 보면 이유가 드러납니다.
ㄷ과 ㅌ은 혀끝을 윗잇몸 쪽에 대어 내는 소리입니다. 반면 ㅣ를 낼 때는 혀의 앞부분이 입천장 쪽으로 올라갑니다. 뒤따르는 ㅣ를 발음할 준비를 하면서 앞의 자음도 그쪽으로 가까워져 [ㅈ], [ㅊ]처럼 나는 현상을 ‘구개음화’라고 합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 발음법 제17항은 받침 ㄷ, ㅌ이 조사나 접미사의 모음 ㅣ와 결합할 때 이런 발음이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밭이’의 ‘이’는 주격 조사입니다. ‘밭이 넓다’라고 할 때의 그 ‘이’죠. ‘미닫이’의 ‘-이’는 새로운 말을 만드는 접미사입니다. 그래서 ‘미닫이’는 [미다지]로 읽습니다. 쓰임은 다르지만, 앞말의 받침이 뒤의 ㅣ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은 같습니다.
왜 ‘역행동화’라고 부를까요?
‘역행’이라는 말이 어렵게 들려도 방향을 그려 보면 간단합니다. 말의 순서는 앞에서 뒤로 흐르는데, 영향을 주는 소리는 뒤에 있습니다. ‘굳이’에서는 뒤의 ㅣ가 앞의 ㄷ을 [ㅈ]으로 바꿉니다. 영향을 거꾸로, 즉 뒤에서 앞으로 미친다고 해서 역행동화라고 부르는 겁니다.
‘동화’는 이웃한 소리의 영향을 받아 소리가 닮아 가는 일입니다. 구개음화는 무엇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가리키는 이름이고, 역행동화는 영향이 어느 방향으로 미치는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서로 다른 현상 두 개가 연달아 일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국립국어원도 구개음화를 뒤의 ㅣ가 앞의 ㄷ, ㅌ에 영향을 주는 역행동화로 설명합니다.
예를 더 놓고 보면 방향이 또렷합니다. ‘같이’는 [가치], ‘해돋이’는 [해도지], ‘맏이’는 [마지]로 읽습니다. 각각 뒤에 붙은 ‘-이’가 앞의 ㅌ이나 ㄷ의 발음에 영향을 줍니다. 글자를 눈으로 따라갈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지만, 소리가 바뀌는 까닭은 오른쪽의 ㅣ에서 찾는 것이죠.
소리는 바뀌는데 표기는 왜 그대로일까요?
학생들이 가장 자주 묻는 말은 이것입니다. “[구지]라고 읽는데 왜 ‘구지’라고 쓰면 안 돼요?” 발음과 표기가 맡은 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발음은 말을 편하게 잇는 모습을 보여 주고, 표기는 그 말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보여 줍니다. ‘굳이’라고 쓰면 ‘굳-’과 ‘-이’의 관계가 보입니다. ‘구지’라고 적으면 그 관계가 가려집니다.
한글 맞춤법 제19항은 어간에 ‘-이’가 붙어 명사나 부사가 된 말의 어간 원형을 밝혀 적도록 합니다. 그 조항의 예에도 ‘미닫이’, ‘같이’, ‘굳이’가 나옵니다. ‘같이’를 [가치]로 읽어도 ‘가치’라고 적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같다’의 ‘같-’에 ‘-이’가 붙어 부사가 된 말이라는 자취를 글자에 남긴 겁니다.
‘붙이다’도 [부치다]로 발음합니다. 그렇다고 표기까지 ‘부치다’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풀로 종이를 붙이다’라고 쓸 때는 ‘붙-’의 형태를 살려 적습니다. 발음이 같아졌다는 이유만으로 원래 단어의 형태를 지우지 않는 것이죠. 읽을 때와 쓸 때 각각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구분하면 덜 헷갈립니다.
ㅣ가 보이면 언제나 구개음화가 일어날까요?
여기서 한 걸음만 더 가면 실수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ㄷ이나 ㅌ 근처에 ㅣ가 보인다고 모두 [ㅈ], [ㅊ]으로 읽지는 않습니다. 표준 발음법 제17항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뒤에 오는 ㅣ가 조사나 접미사의 모음이라는 점입니다. ‘밭이’는 [바치]지만, 조사 ‘에’가 붙은 ‘밭에’는 [바테]입니다. 뒤의 모음이 달라지니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잔디’나 ‘견디다’도 구개음화의 보기로 들지 않습니다. 둘 다 글자에 ㄷ과 ㅣ가 이어 보이지만, ‘굳-’ 뒤에 ‘-이’가 붙는 구조와 다릅니다. 무엇보다 ㄷ이 앞말의 받침으로 있다가 뒤에 붙은 조사나 접미사의 ㅣ를 만나는 경우가 아닙니다. 글자 두 개를 찾기보다 말이 어디에서 나뉘는지 먼저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조금 다른 길을 거치는 말도 있습니다. ‘굳히다’는 [구치다]로 읽습니다. 먼저 ㄷ과 ㅎ이 합쳐져 [ㅌ]이 되고, 그 [ㅌ]이 뒤의 ㅣ 앞에서 [ㅊ]으로 바뀝니다. 표준 발음법 제17항의 붙임은 ‘닫히다’ [다치다], ‘묻히다’ [무치다]도 함께 제시합니다. 같은 [ㅊ] 소리가 나더라도 중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보면 발음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구개음화 역행동화’라는 말이 길어서 외워야 할 항목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를 소리 내어 읽고, 뒤의 ㅣ가 앞의 ㄷ을 움직였다고 생각하면 방향이 보입니다. 표기 ‘굳이’에는 그 말의 짜임이 남아 있고, 발음 [구지]에는 소리가 만나는 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둘을 함께 보면 헷갈리던 글자에도 제 나름의 이유가 생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