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에서 작가를 만난 아이가 공책 한 장을 내밀며 사인을 부탁하는 장면을 떠올려 봤습니다. 책을 가져오지 못했더라도, 좋아하는 작가를 만난 기념을 남기고 싶었을 겁니다. 최근 한 동화작가가 그런 학생들의 공책 대신 팔에 사인을 해준 일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습니다. 왜 이 장면이 많은 사람에게 불편하게 다가왔을까요?
학교 강연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11월 6일 SBS 등 보도에 따르면, 한 동화작가는 학교 강연 뒤 자신의 책이 아닌 공책 종이에 사인을 요청한 초등학생들에게 종이 사인은 해주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사회관계망서비스에 공책을 찢어 내미는 아이들에게는 사인하지 않으며 팔뚝이라면 가능하다는 취지로 적었습니다. 함께 올린 사진에는 학생 두 명이 소매를 걷어 올린 팔에 사인을 받은 모습이 담겼습니다.
작가는 학교에서 작가와의 만남이 있다면 최소한 책을 사서 사인받으려는 마음이 예의라고 학생들에게 말했고, 이를 부모에게도 전하라고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글이 퍼지자 어린이에게 책 구매를 사실상 요구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이후 해당 게시물은 삭제됐고 계정은 비활성화됐다고 보도됐습니다.
여기서 확인되는 사실과 알 수 없는 부분은 구분해야 합니다. 보도된 사진과 게시글만으로 학생들이 팔에 사인받는 일을 얼마나 편하게 받아들였는지, 현장에 어떤 안내가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학교나 학부모가 사전에 책을 준비하도록 안내받았는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책을 사 와야 예의라는 말이 왜 걸렸을까요?
작가의 책을 구입해 읽고 사인을 받으면 작가에게 뜻깊을 수 있습니다. 사인회에서는 책을 지참하거나 현장에서 구입하는 방식도 낯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학교가 마련한 작가와의 만남에서 벌어졌습니다. 아이들은 책을 사러 간 손님이라기보다 학교 활동에 참여한 학생에 가깝습니다.
같은 반에서도 집에 작가의 책이 있는 아이와 없는 아이가 있습니다. 부모가 미리 책을 사줄 여건도 다르고, 행사 소식을 늦게 들었을 수도 있죠. 이런 상황에서 책을 사 오는 일을 ‘예의’의 기준으로 말하면, 책이 없는 아이는 자신이나 부모가 예의를 지키지 못했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책 구매 여부가 아이의 관심이나 성의를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공책을 찢어 내미는 행동을 작가가 아쉽게 느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종이가 구겨지거나 보관하기 어려워 보였을 수 있으니까요. 다만 그럴 때에도 아이가 왜 종이를 내밀었는지 생각해볼 여지는 있습니다.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이 공책뿐이어서 한 장을 꺼냈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의 의도를 다르게 읽은 순간에 어른이 어떤 말을 건네느냐가 중요해집니다.
팔에 사인한 점도 별개의 문제입니다
팔에 사인을 받는 일이 언제나 불쾌한 경험인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먼저 원하고 즐겁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논란에서는 종이 사인을 거절한 뒤 팔이 대안으로 제시됐다는 맥락을 함께 봐야 합니다. 원래 원한 곳에는 받을 수 없고 몸에 받는 선택지만 남았다면, 아이가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학교 행사에서는 어른과 아이의 위치도 다릅니다. 학생은 초대받은 작가의 말을 거절하기 어려울 수 있고, 주위 친구들의 시선도 의식합니다. 특히 몸에 직접 무언가를 남기는 행동은 아이가 원하는지 먼저 묻고, 원하지 않아도 민망하지 않게 물러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 사례를 두고 제기된 불편함은 사인 자체만큼이나 그 과정에서 아이의 선택이 충분히 존중됐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아이의 학교 행사에는 무엇이 달라질까요?
이번 논란으로 모든 학교의 작가 만남 방식이 바뀌었다거나 책 구매 규정이 새로 생긴 것은 아닙니다. 당장 학부모가 책을 꼭 사서 보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비슷한 행사를 준비하는 학교라면 사인 대상과 준비물을 사전에 분명히 알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책을 가진 학생만 참여하는 행사인지, 책이 없는 학생도 종이나 책갈피에 사인을 받을 수 있는지 알려주면 아이와 부모 모두 덜 당황합니다.
작가에게도 선택지는 있습니다. 종이 사인이 어렵다면 이유를 부드럽게 설명하거나, 행사 전에 학교와 사인 방식을 조율할 수 있습니다. 학교는 책을 준비하지 못한 학생이 행사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간단한 종이나 책갈피를 마련할 수 있고요. 큰 비용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책을 샀는지와 관계없이 만남에 참여할 수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 일은 누가 더 예의 없었는지를 따지는 데서 끝나기보다, 학교에서 아이를 손님이 아닌 배움의 주인공으로 대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아이가 작가를 만난 뒤 오래 기억할 것은 팔에 남은 잉크보다 그때 들은 말과 자신이 대접받았다고 느낀 방식일지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