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컬링 한일전 장면을 다시 보는데, 점수판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김민지의 표정이었다.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스톤이 손을 떠난 뒤 하우스 안 구도가 바뀌는 순간을 보면, 왜 팬들이 그를 단순한 인기 선수보다 ‘경기 흐름을 바꾸는 선수’로 기억하는지 알 수 있다.
김민지는 오래전부터 ‘컬링 아이돌’처럼 불렸다. 얼굴이 알려지고, 팬덤이 생기고, 경기 외적인 관심도 따라붙었다. 솔직히 그런 별명은 선수에게 양날의 검이다. 예쁜 이미지가 먼저 소비되면 기록이 뒤로 밀리기 쉽다. 근데 김민지는 그 반대에 가깝다. 별명을 타고 들어온 시선이 결국 기록으로 붙잡히는 선수다.
한일전 7-5, 숫자보다 컸던 8엔드의 무게
2026 밀라노 코르티나 동계올림픽 여자 컬링 예선에서 한국은 일본을 7-5로 이겼다. 월드컬링 경기 기록을 기준으로 보면 이 경기는 단순한 2점 차 승리가 아니었다. 한국은 2엔드와 3엔드에 연속 스틸로 2-0을 만들었고, 일본이 4엔드 2득점으로 균형을 맞췄다. 전반은 한국 3-2 리드. 여기까지만 보면 팽팽한 라이벌전의 전형이었다.
진짜 장면은 후반에 나왔다. 한국은 7엔드를 블랭크로 넘기며 후공을 8엔드로 가져갔고, 그 8엔드에서 3점을 뽑았다. 컬링에서 8엔드 3득점은 단순히 점수를 벌리는 장면이 아니다. 남은 2엔드 운영권까지 바꾸는 장면이다. 6-3이 되면 상대는 9엔드부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고, 수비하는 쪽은 하우스 중앙을 통제하며 시간을 쓸 수 있다.
그 8엔드에서 김민지의 역할이 컸다. 월드컬링은 김은지가 마지막 샷을 마무리했지만, 그 상황을 만든 선수가 서드 김민지였다고 전했다. 컬링에서 서드는 스킵의 마지막 두 샷을 위해 판을 깔아주는 자리다. 야구로 치면 8회 셋업맨에 가깝고, 농구로 치면 클러치 직전의 스크린과 패스를 책임지는 선수다. 스포트라이트는 마지막 샷에 몰리지만, 실제 승부의 방향은 그 전에 이미 기울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김민지의 기록은 이미 ‘반짝’이 아니었다
김민지를 아이돌형 선수로만 보면 놓치는 장면이 많다. 1999년생인 그는 2019년 세계여자컬링선수권에서 스킵으로 한국 컬링 사상 첫 시니어 세계선수권 메달을 따냈다. 당시 팀은 ‘리틀 팀킴’으로 불렸고, 세계선수권 동메달은 한국 여자 컬링이 평창의 열기를 기록으로 이어갔다는 신호였다.
이후 흐름도 꽤 흥미롭다. 김민지는 스킵으로 주목받은 뒤, 경기도청 팀에서는 서드 역할을 맡았다. 보통 밖에서 보면 스킵이 가장 화려해 보인다. 하지만 강팀은 좋은 서드를 갖고 있을 때 훨씬 단단해진다. 서드는 상대 스톤을 걷어내는 테이크아웃, 가드 뒤로 숨기는 드로, 복잡한 하우스를 풀어내는 런백까지 폭넓게 처리해야 한다.
- 2019 세계여자컬링선수권 동메달, 한국 컬링 첫 시니어 세계선수권 메달
- 2024 세계여자컬링선수권 동메달 멤버
- 2025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금메달 멤버
- 2026 밀라노 코르티나 올림픽 여자 4인조 5위, 예선 5승 4패
이 정도 이력이라면 ‘인기 많은 선수’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김민지는 이미 여러 대표팀 사이클을 지나며 포지션과 역할을 바꿔 살아남은 선수다. 그게 더 어려운 일이다. 한 번 잘하는 것보다, 팀 구조가 바뀐 뒤에도 필요한 선수가 되는 게 훨씬 까다롭다.
왜 한일전에서 더 크게 보였나
한일전은 늘 감정이 먼저 달아오른다. 그런데 컬링 한일전은 특히 묘하다. 일본 여자 컬링은 후지사와 사츠키, 요시무라 사야카 등 국제무대 경험이 많은 선수들을 앞세워 꾸준히 강한 전력을 유지해왔다. 한국도 평창 은메달 이후 팀킴, 팀민지, 경기도청으로 이어지는 경쟁 구도가 생기며 깊이가 생겼다.
월드컬링 개인 맞대결 기록에서 김민지는 일본 팀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쌓았다. 주니어 시절부터 일본을 만났고, 2018 아시아태평양선수권 결승에서는 후지사와 팀을 12-8로 꺾은 기록도 있다. 2019 세계선수권에서는 일본을 상대로 11-4, 7-5 승리를 기록했다. 2026 올림픽의 7-5 승리는 갑자기 튀어나온 이변이 아니라, 꽤 오래 누적된 경쟁사의 최신 장면에 가깝다.
특히 컬링은 상대 전적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종목이다. 얼음 상태, 라인 읽기, 스톤 컨디션, 후공 관리가 전부 엮인다. 그래서 한일전 승리는 더 가치가 있다. 감정이 뜨거운 경기일수록 샷 선택은 차가워야 한다. 김민지가 돋보인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분위기는 뜨거운데, 플레이는 계산적이었다.
‘컬링 아이돌’이라는 별명이 기록을 가리지 않았으면
팬 입장에서 스타성은 분명 반갑다. 컬링처럼 비시즌 노출이 적은 종목은 대중이 이름을 기억하는 선수 한 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김민지가 ‘컬링 아이돌’로 불리는 건 그 자체로 나쁜 일이 아니다. 다만 그 별명이 경기력을 설명하는 문장보다 앞서면 조금 아쉽다.
김민지의 매력은 예쁜 이미지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10대 후반부터 국제대회에서 일본, 스위스, 캐나다 같은 강팀을 상대했고, 스킵과 서드를 오가며 자기 역할을 다시 만들었다. 한일전 8엔드처럼 화면에 오래 남는 장면도 있지만, 그 장면을 가능하게 만든 건 수년간의 포지션 적응과 큰 경기 경험이다.
그래서 나는 김민지를 볼 때 ‘아이돌’보다 ‘흐름을 읽는 서드’라는 표현이 더 오래 남는다. 팬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기록으로 다시 붙잡는 힘도 있다. 컬링에서 그런 선수는 흔하지 않다. 다음 한일전에서도 점수보다 먼저 보고 싶은 건, 김민지가 어느 엔드에서 판을 뒤집을 작은 틈을 만들어내는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