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수업에서 한 분이 냉장고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애호박 반 개, 양배추 한 통, 두부 두 모, 대파 한 단이 전부 애매하게 남아 있더라고요. 식단을 못 짜서가 아니라, 장 본 재료를 어떤 순서로 써야 하는지 몰라서 자꾸 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방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식단은 거창한 계획표가 아니라 재료의 수명표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됩니다. 빨리 무르는 것부터 쓰고, 오래 가는 재료는 뒤로 빼고, 국물 하나를 끓이면 다음 끼니 반찬까지 이어지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집밥은 매 끼니 새 요리를 만드는 일이 아니에요. 같은 재료를 지루하지 않게 돌려 쓰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식단은 메뉴보다 냉장고 순서부터 잡아야 합니다
초보 때 제일 많이 하는 실수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메뉴 이름을 먼저 쓰는 겁니다. 월요일 제육볶음, 화요일 카레, 수요일 된장찌개처럼요. 그런데 이렇게 짜면 장바구니가 커지고, 남은 재료가 서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저는 식단을 짤 때 먼저 재료를 세 묶음으로 나눕니다. 첫째는 2일 안에 써야 하는 재료, 둘째는 4일 정도 버티는 재료, 셋째는 일주일 이상 가는 재료입니다. 상추, 숙주, 깻잎, 부추는 빨리 씁니다. 애호박, 버섯, 두부는 중간에 넣습니다. 무, 양파, 감자, 당근, 달걀, 냉동 고기는 뒤까지 끌고 갈 수 있습니다.
- 상추와 깻잎: 첫날 쌈이나 겉절이로 사용
- 숙주와 부추: 둘째 날 볶음이나 국에 사용
- 애호박과 버섯: 셋째 날 찌개, 전, 볶음으로 사용
- 무와 양파: 국물, 조림, 볶음밥에 나누어 사용
이 순서만 잡아도 식단이 훨씬 편해집니다. 메뉴를 예쁘게 짜는 것보다 재료가 상하기 전에 쓰는 게 먼저입니다. 식당 주방에서도 발주한 재료를 먼저 넣은 순서대로 쓰는 게 기본이에요. 집 냉장고도 작을 뿐 원리는 같습니다.
일주일 식단은 3가지 중심 요리로 충분합니다
집에서 일주일 식단을 짤 때 7가지 메인 요리를 넣으면 금방 지칩니다. 저는 보통 중심 요리 3가지만 잡습니다. 국물 요리 하나, 볶음 요리 하나, 조림이나 구이 하나. 이렇게 잡으면 재료가 겹쳐도 덜 질리고, 조리 순서도 단순해집니다.
예를 들어 장바구니에 두부 2모, 돼지고기 앞다리살 600g, 애호박 1개, 양파 3개, 대파 1단, 양배추 반 통, 달걀 10개가 있다면 이렇게 굴릴 수 있습니다.
- 첫째 날: 돼지고기 300g으로 제육볶음, 상추나 양배추쌈 곁들이기
- 둘째 날: 남은 제육 100g을 잘게 잘라 볶음밥으로 사용
- 셋째 날: 두부 1모와 애호박 반 개로 된장찌개
- 넷째 날: 양배추, 달걀, 대파로 달걀덮밥
- 다섯째 날: 돼지고기 300g과 양파로 간장불고기
- 여섯째 날: 두부 반 모를 부쳐 양념장 올리기
- 일곱째 날: 남은 채소로 국이나 비빔밥 만들기
여기서 중요한 건 양입니다. 고기 600g을 한 번에 다 볶아두면 첫날은 편하지만 셋째 날부터 냄새가 올라올 수 있습니다. 양념한 생고기는 냉장에서는 보통 1~2일 안에 쓰는 게 낫고, 더 늦게 먹을 분량은 처음부터 300g씩 나눠 냉동하는 편이 안정적입니다.
불 세기와 물 양을 정하면 실패가 줄어듭니다
식단표에는 메뉴 이름만 적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실패는 조리할 때 납니다. 특히 국과 찌개는 물 양이 애매하면 맛이 흐려집니다. 된장찌개 2인분이면 물 500ml에 된장 1.5큰술부터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채소가 많이 들어가면 물이 더 나오니 처음부터 700ml를 붓지 않는 게 낫습니다.
볶음 요리는 팬 예열이 중요합니다. 제육볶음은 중강불에서 팬을 1분 정도 달군 뒤 고기를 넓게 펴야 물이 덜 생깁니다. 고기를 넣자마자 뒤적이면 온도가 떨어져서 볶음이 아니라 조림처럼 됩니다. 처음 1분은 참아야 해요. 가장자리 색이 바뀌면 그때 뒤집고, 양파는 고기가 70퍼센트쯤 익었을 때 넣어야 단맛은 살고 물은 덜 나옵니다.
제가 예전에 수업 준비하면서 제육을 한 번 망친 적이 있습니다. 고기 1kg을 한 팬에 다 넣었더니 팬 온도가 확 떨어져서 국물이 반 컵 넘게 생겼어요. 그 뒤로는 500g 이상은 두 번에 나눠 볶습니다. 집에서도 4인분 이상 볶을 때는 큰 팬 하나보다 두 번 나눠 조리하는 게 맛이 더 낫습니다.
재료가 없을 때는 같은 역할끼리 바꾸면 됩니다
식단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재료를 꼭 맞춰야 한다는 부담입니다. 그런데 집밥은 대체가 잘 됩니다. 단, 아무거나 바꾸면 맛이 흐트러지니 역할을 보고 바꾸는 게 좋습니다.
- 단맛 채소: 양파가 없으면 대파 흰 부분, 양배추, 당근을 조금 사용
- 국물 채소: 무가 없으면 양파와 다시마를 늘리고 물을 50ml 줄이기
- 식감 채소: 애호박이 없으면 버섯, 가지, 양배추로 대체
- 단백질: 돼지고기 대신 닭다리살, 두부, 달걀 사용
- 매운맛: 청양고추가 없으면 고춧가루를 0.5작은술만 추가
예를 들어 된장찌개에 애호박이 없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버섯 한 줌을 넣으면 향이 살아나고, 양배추를 한 줌 넣으면 국물이 살짝 달아집니다. 대신 양배추를 넣을 때는 오래 끓이면 냄새가 날 수 있어서 마지막 5분 안에 넣는 게 좋습니다.
두부가 없을 때 달걀을 풀어 넣는 것도 괜찮습니다. 다만 달걀은 센 불에서 바로 저으면 국물이 탁해집니다. 불을 중약불로 낮추고, 달걀물을 원을 그리듯 붓고, 20초 정도 기다렸다가 한두 번만 저으면 부드럽게 익습니다.
식단표는 느슨하게, 밥상은 현실적으로
제가 권하는 방식은 매 끼니를 꽉 채우는 식단이 아닙니다. 밥, 국 또는 찌개, 단백질 반찬 하나, 채소 반찬 하나면 충분합니다. 반찬을 5가지씩 놓으려고 하면 금방 지치고 설거지도 늘어납니다.
하루에 한 번만 제대로 조리하고, 나머지는 남은 음식을 변형하는 식으로 가면 오래 갑니다. 된장찌개를 끓인 날에는 다음 끼니에 밥을 넣고 죽처럼 끓여도 좋고, 제육볶음이 남으면 김가루와 달걀을 넣어 볶음밥으로 바꾸면 됩니다. 간장불고기 국물이 조금 남았을 때는 물 100ml와 삶은 당면 한 줌을 넣으면 새 반찬처럼 먹을 수 있습니다.
식단을 잘 짠다는 건 대단한 요리를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먼저 보고, 빨리 상하는 것부터 쓰고, 불 세기와 물 양을 조금만 정확히 잡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3일치만 짜도 충분합니다. 3일만 굴러가면 남은 재료가 보이고, 그 재료가 다음 밥상을 알려줍니다. 집밥은 그렇게 조금 느슨해야 계속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