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객석에서 다시 느낀 건데, <위키드>는 줄거리만 알고 들어가면 절반만 보는 작품입니다. 초록 피부의 엘파바가 왜 오해받는지, 글린다가 왜 사랑받는 얼굴을 하고도 흔들리는지, 그 관계의 결이 객석 위치와 캐스팅에 따라 꽤 다르게 보이거든요. 저는 공연 기획 일을 오래 하면서 대극장 뮤지컬을 많이 봤지만, <위키드>처럼 ‘스펙터클’과 ‘정서의 미세한 균열’을 동시에 요구하는 작품은 생각보다 드뭅니다.
뮤지컬 위키드 한국 공연, 먼저 버전부터 구분하기
한국에서 <위키드>를 말할 때는 크게 세 갈래로 나눠 보는 게 좋습니다. 2012년 오리지널 내한, 2013~2014년 한국어 초연, 2016년과 2021년의 한국어 공연, 그리고 2025~2026년 인터내셔널 투어 내한입니다. 같은 제목이지만 관람 경험은 다릅니다. 한국어 공연은 대사와 가사의 뉘앙스가 바로 들어와서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기 좋고, 내한 공연은 원어 특유의 리듬과 브로드웨이식 호흡을 맛보는 쪽에 가깝습니다.
2025년 내한은 서울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2025년 7월 12일부터 10월 26일까지,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2025년 11월 13일부터 2026년 1월 18일까지, 대구 계명아트센터에서 2026년 2월 5일부터 3월 1일까지 이어진 투어였습니다. 공식 공연 안내 기준으로 러닝타임은 인터미션 포함 약 170분, 관람 연령은 8세 이상으로 공지됐습니다. 이 정도 길이면 1막 후반부터 집중력이 크게 갈리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라면 낮 공연이 훨씬 낫습니다.
처음 보는 관객이라면 이렇게 접근하면 편하다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를 뒤집어 보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원작을 완벽히 알고 가야 하는 공연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줄거리 정보를 넣고 가면 1막의 반전 감각이 옅어질 수 있어요. 기본만 알고 가면 충분합니다. 엘파바는 사람들이 ‘나쁜 마녀’라고 부르는 인물이고, 글린다는 모두가 사랑하는 ‘착한 마녀’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인물입니다. 공연은 그 두 사람이 처음부터 그런 이름을 가졌는지 묻습니다.
제가 초보 관객에게 권하는 관람 포인트는 세 가지입니다.
- 엘파바가 노래를 크게 부르는 순간보다, 말을 삼키는 장면을 보세요.
- 글린다의 코미디가 웃기기만 한지, 불안을 감추는 방식인지 보세요.
- 무대 장치가 화려한 장면에서 인물들이 어디를 바라보는지 놓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특히 ‘Defying Gravity’는 워낙 유명해서 기대치가 높습니다. 하지만 이 넘버는 고음 자랑만으로 끝나는 곡이 아닙니다. 엘파바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장면이고, 무대적으로는 플라잉과 조명, 앙상블의 시선이 한꺼번에 한 인물을 밀어 올립니다. 좋은 엘파바는 그 순간을 ‘멋진 장면’이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선택’으로 만듭니다.
좌석은 무조건 앞줄보다 시야 균형이 중요하다
<위키드>는 무대 위 정보량이 많은 작품입니다. 용, 버블머신, 에메랄드 시티의 군무, 학교 장면의 동선, 의상 변화가 계속 나오기 때문에 너무 앞이면 장치의 크기는 체감해도 전체 그림을 놓칠 수 있습니다. 초연 때부터 제가 주변에 가장 많이 말한 좌석 기준은 ‘중앙, 약간 뒤’였습니다. 대극장 기준으로 1층 중블 중후반이나 2층 앞쪽은 무대 디자인을 읽기에 좋습니다.
물론 배우 표정과 호흡을 중요하게 보는 관객이라면 1층 앞쪽도 매력적입니다. 다만 <위키드>는 얼굴만 보는 공연이 아닙니다. 글린다가 높은 곳에서 등장하는 장면, 엘파바의 플라잉, 군중이 한 사람을 몰아세우는 장면은 시야가 넓을수록 의미가 선명해집니다. 저는 처음 관람이라면 1층 8~15열 안팎의 중앙 구역을 선호하고, 재관람이라면 배우 디테일을 보러 조금 앞으로 들어갑니다.
부산과 대구 공연장을 고를 때
부산 드림씨어터는 대극장 뮤지컬에 익숙한 관객이 편하게 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계명아트센터는 대구 관객에게 접근성이 좋고, 투어 후반 특유의 안정된 합을 기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투어 공연은 도시가 바뀌면 음향 체감도 달라집니다. 같은 배우, 같은 세트라도 객석 구조와 잔향 때문에 넘버의 인상이 달라져요. 그래서 지방 공연은 ‘서울에서 본 것과 같은 공연’이라기보다 ‘다른 극장에서 다시 조율된 공연’으로 보는 편이 맞습니다.
캐스팅을 볼 때 이름값보다 페어의 온도를 보자
<위키드>는 엘파바 혼자 끌고 가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엘파바와 글린다의 균형이 핵심입니다. 엘파바가 강하면 글린다는 단순히 밝은 인물이 아니라 그 강함을 사회적으로 번역하는 인물처럼 보여야 하고, 글린다가 섬세하면 엘파바는 더 외롭게 보입니다. 한국어 초연에서 옥주현, 박혜나, 김선영의 엘파바와 정선아, 김보경, 김소현의 글린다가 서로 다른 결을 만들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2025년 내한 공연에서는 글린다 역 코트니 몬스마, 엘파바 역 셰리든 아담스가 주요 캐스트로 소개됐고, 공연 중에는 컨디션과 운영 상황에 따라 얼터네이트나 커버 배우가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점도 관객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건 사고라기보다 대형 뮤지컬이 장기 공연을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브로드웨이식 프로덕션은 주연 배우 한 명에게만 모든 회차를 걸지 않습니다. 공연의 질을 일정하게 지키기 위한 시스템이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예매 전 캐스팅보드를 확인하되, 캐스팅 변경 가능성도 어느 정도 열어두는 편이 마음이 편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커버 배우가 올라온 회차에서 뜻밖의 명장면을 만나는 일도 꽤 있습니다. 스타 캐스팅의 에너지도 좋지만, 이 작품은 역할 해석이 조금만 달라져도 관계의 무게중심이 바뀌어서 재관람 가치가 생깁니다.
취향이 갈릴 수 있는 지점도 분명하다
<위키드>는 대중성이 강한 작품입니다. 멜로디는 선명하고, 무대는 크고, 감정선도 비교적 친절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취향이 갈릴 수 있습니다. 실험적인 구조나 날카로운 현대극의 밀도를 기대한다면 다소 설명적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뮤지컬이 줄 수 있는 음악적 쾌감, 의상과 조명, 캐릭터의 성장 서사를 좋아한다면 만족도가 높을 가능성이 큽니다.
저는 이 작품을 ‘처음 뮤지컬을 보는 사람에게 추천하기 쉬운 작품’으로 봅니다. 이유는 단순히 유명해서가 아닙니다. 공연이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움직입니다. 1막은 관계를 쌓고, 2막은 그 관계가 사회적 오해와 권력 안에서 어떻게 뒤틀리는지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보고 나면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지보다, 누가 그렇게 불리게 되었는지가 남습니다.
한국에서 <위키드>를 본다는 건 단순히 해외 히트작을 소비하는 일이 아닙니다. 번역 공연으로 만날 때는 말맛과 감정이 가까워지고, 내한 공연으로 만날 때는 원어 프로덕션의 속도와 스케일이 살아납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쉽게 자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첫 관람이라면 시야 좋은 중앙 좌석에서 전체 설계를 보고, 두 번째라면 원하는 배우의 해석을 따라가 보세요. 이 작품은 한 번 봤을 때보다 두 번째 볼 때, 누군가의 미소가 왜 조금 늦게 사라지는지 더 잘 보이는 공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