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급하게 발표 자료를 만들 일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내용은 다 있는데 PPT가 너무 허전해 보였다. 글자는 빽빽하고, 색은 나름 맞춘 것 같은데 화면을 넘길 때마다 ‘왜 이렇게 과제 느낌이 나지?’ 싶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거창한 디자인 툴을 쓰지 않고, 평소 파워포인트 안에서 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PPT디자인을 손봤다.
솔직히 처음에는 예쁜 템플릿을 하나 사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기존 자료를 뜯어보니 문제는 템플릿이 아니라 기본 배치와 강조 방식에 있었다. 같은 내용인데도 여백, 글자 크기, 색 개수만 줄였더니 훨씬 덜 촌스러워졌다.
처음부터 예쁘게 만들려고 해서 더 꼬였다
내가 만든 첫 버전은 흔한 실수의 모음이었다. 제목은 28pt, 본문은 16pt, 표 안의 글자는 10pt까지 내려갔다. 한 장에 문장이 8줄 넘게 들어간 페이지도 있었고, 강조색은 파랑, 빨강, 노랑, 초록이 다 섞여 있었다. 만들 때는 열심히 꾸민 느낌이었는데,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디를 먼저 봐야 할지 애매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장식 지우기였다. 그림자, 두꺼운 테두리, 의미 없는 아이콘을 빼고 화면을 흑백으로 봤다. 이 방법이 은근히 효과가 있었다. 색을 빼고 봤을 때도 중요한 부분이 보이면 구조가 잡힌 것이고, 색을 빼자마자 전부 비슷해 보이면 배치부터 다시 봐야 했다.
특히 제목과 본문의 차이가 생각보다 중요했다. 제목은 32~40pt 정도로 키우고, 본문은 18~22pt 선에서 맞췄다. 발표용이면 작은 글씨를 넣고 싶은 마음을 참고, 한 줄에 25자 안팎으로 끊는 편이 훨씬 보기 좋았다. 종이에 인쇄해 읽는 문서와 화면으로 보는 PPT는 확실히 다르다.
3가지 규칙만 잡아도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번에 가장 효과가 컸던 건 규칙을 적게 만든 것이다. 나는 색 2개, 글꼴 1개, 강조 방식 1개만 정했다. 예를 들어 기본 글자는 진한 회색, 강조는 남색, 보조 배경은 아주 연한 회색으로 두는 식이다. 이렇게 제한을 걸어두니 슬라이드를 넘겨도 같은 사람이 만든 자료처럼 보였다.
- 색은 기본색 1개와 강조색 1개만 먼저 고른다.
- 본문 글꼴은 하나로 통일하고 굵기만 바꾼다.
- 강조는 밑줄, 굵게, 색상 중 하나만 주로 쓴다.
- 한 장에는 메시지를 하나만 남긴다.
근데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자료를 만들다 보면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그럴 때는 슬라이드 맨 위에 이 장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한 문장으로 써봤다. 예를 들면 ‘매출은 늘었지만 재구매율은 떨어졌다’처럼 구체적으로 쓰는 것이다. 그 문장과 관련 없는 표, 문장, 이미지는 과감히 다음 장으로 넘겼다.
재미있었던 건 내용을 줄였는데 오히려 발표가 편해졌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화면에 적힌 문장을 따라 읽느라 발표가 딱딱했는데, 슬라이드에는 단서만 남기니 내가 설명하는 흐름이 살아났다. PPT디자인은 예쁘게 꾸미는 일이라기보다, 말할 순서를 보이게 만드는 일에 더 가까웠다.
여백은 빈 공간이 아니라 숨 쉴 자리였다
처음에는 빈 공간이 있으면 뭔가 덜 만든 것 같았다. 그래서 표를 키우고, 설명을 붙이고, 작은 이미지를 하나 더 넣었다. 그런데 화면을 멀리서 보니 오히려 답답했다. 회의실 뒤쪽에서 보는 사람은 작은 글씨를 읽지 못하고, 온라인 화면 공유에서는 표의 숫자가 뭉개져 보였다.
그래서 슬라이드 가장자리에는 일정한 여백을 두고, 요소 사이 간격도 일부러 넓혔다. 대략 상하좌우 5~8% 정도를 비워두니 훨씬 안정적으로 보였다. 표를 넣을 때도 모든 숫자를 다 보여주기보다, 말하고 싶은 행 3개만 남기는 편이 나았다. 전체 데이터가 필요하면 부록 장으로 빼면 됐다.
이미지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사진 여러 장보다 큰 이미지 한 장이 훨씬 강했다. 제품 비교라면 두 이미지를 같은 크기로 나란히 두고, 차이점은 짧은 라벨로 붙였다. 배경 사진 위에 글자를 얹을 때는 글자 뒤에 반투명 박스를 까는 대신, 사진의 어두운 영역을 찾아 제목을 배치했다. 그래야 급하게 만든 느낌이 덜했다.
템플릿보다 중요한 건 반복되는 기준이었다
템플릿을 쓰면 빨리 예뻐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용이 템플릿에 맞지 않아 더 어색해질 때가 많았다. 특히 무료 템플릿은 첫 장은 화려한데, 표나 그래프가 많은 중간 페이지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무너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기본 슬라이드 3종만 만들어두는 쪽이 더 편했다.
- 큰 메시지 한 문장만 보여주는 장
- 표나 그래프 하나를 설명하는 장
- 비교 항목 2~3개를 나란히 보여주는 장
이 3가지만 있으면 대부분의 자료는 돌려 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회의 보고서, 제안서, 수업 발표 자료도 결국 메시지, 근거, 비교의 조합이었다. 슬라이드마다 새 디자인을 만들지 않아도 되니 시간도 줄었다. 20장짜리 자료를 만들 때 예전에는 디자인만 2시간 넘게 붙잡고 있었는데, 기준을 만든 뒤에는 40분 정도면 전체 톤을 맞출 수 있었다.
또 하나 의외로 중요한 건 정렬이었다. 파워포인트의 맞춤 기능으로 왼쪽, 가운데, 간격을 맞추면 갑자기 자료가 차분해진다. 사람 눈은 삐뚤어진 선을 꽤 빨리 알아차린다. 내용이 좋아도 박스 위치가 조금씩 다르면 덜 믿음직해 보인다. 그래서 마지막 점검 때는 글을 더 고치기보다 요소들이 같은 선 위에 있는지 봤다.
직접 고쳐보니 PPT디자인은 덜어내는 쪽에 가까웠다
이번에 3장만 제대로 고쳐본 뒤 전체 자료에 적용해보니, 가장 큰 변화는 ‘덜 설명해도 보인다’는 점이었다. 제목이 메시지를 말하고, 본문은 근거를 짧게 받치고, 색은 시선이 가야 할 곳에만 쓰였다. 화려한 효과는 거의 없었지만 발표 자료답게 보였다.
물론 모든 PPT가 단순해야 하는 건 아니다. 행사 오프닝이나 브랜드 소개 자료라면 이미지와 분위기가 더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회의, 보고, 과제, 제안처럼 내용을 설득해야 하는 자료라면 예쁜 장식보다 읽히는 구조가 먼저였다.
내 기준으로는 PPT디자인이 막힐 때 새 템플릿을 찾기 전에 세 가지만 먼저 보면 된다. 한 장에 말이 너무 많은지, 강조색이 너무 많은지, 요소들이 같은 선을 타고 있는지. 이 세 가지를 고치면 디자인 감각이 아주 뛰어나지 않아도 자료가 꽤 단정해진다. 나도 아직 멋진 발표 자료를 뚝딱 만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제는 빈 슬라이드를 보고 겁부터 먹지는 않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