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방콕에 다녀왔는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느려졌다. 여행의 시작이 요란하지 않아서였을까. 타이항공을 탔고, 기내에서부터 방콕의 공기가 아주 얇게 묻어나는 느낌이 있었다. 승무원의 말투나 식사의 향, 창밖으로 보이던 구름의 속도까지도 여행지의 첫 골목처럼 다가왔다.
사실 방콕 하면 왕궁, 카오산로드, 대형 쇼핑몰을 먼저 떠올리기 쉽다. 그런데 나는 그런 곳보다 동네 시장 옆 좁은 길, 오후 3시쯤 사람 소리가 줄어드는 운하 근처, 주민들이 천천히 밥을 먹는 작은 식당에 더 오래 머무는 편이다. 타이항공은 그런 여행을 시작하기에 꽤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비행 자체가 목적지는 아니지만, 여행의 결을 은근히 바꿔주긴 했다.
타이항공을 고른 이유는 편안함보다 리듬이었다
인천에서 방콕까지 가는 시간은 보통 5시간대다. 아주 길지도, 짧지도 않다. 이 정도 비행에서는 좌석의 작은 차이, 식사 타이밍, 승무원의 응대 같은 것들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진다. 나는 밤늦게 도착해서 바로 도시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도착 전에 너무 지치지 않는 게 중요했다.
타이항공은 화려하게 새롭다기보다 익숙하고 안정적인 쪽에 가까웠다. 기내 분위기는 차분했고, 식사는 강한 향신료보다 무난한 맛으로 맞춰져 있었다. 물론 항공편과 기종에 따라 차이는 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여행자를 빨리 흥분시키기보다 천천히 현지로 넘겨주는 느낌이었다.
나는 비행기에서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자주 창밖을 보는 편이다. 구름 사이로 해가 내려앉을 때, 곧 도착할 도시의 습도와 소음까지 상상하게 된다. 타이항공의 보라색 톤과 조용한 안내 방송은 그런 시간과 잘 맞았다. 여행 전부터 너무 많은 자극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수완나품공항에서 동네로 들어가는 길
방콕에 도착하면 많은 사람들이 바로 택시를 잡거나 공항철도를 탄다. 나도 일정에 따라 둘 다 이용해봤다. 짐이 적고 숙소가 역 근처라면 공항철도가 편하다. 반대로 늦은 밤이거나 숙소가 골목 안쪽이라면 택시가 덜 피곤하다. 다만 택시는 시간대에 따라 도로 위에서 40분이 1시간 30분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는 일부러 중심가보다 한 정거장쯤 비껴난 동네에 숙소를 잡았다. 유명한 거리 바로 옆이 아니라,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과 노점이 먼저 보이는 곳이었다. 관광지까지 가는 데 10분 정도 더 걸렸지만, 대신 밤에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훨씬 조용했다.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 과일을 깎는 손, 오토바이가 지나간 뒤 남는 따뜻한 바람 같은 것들이 여행의 배경이 됐다.
방콕은 처음부터 깊게 들어가려고 하면 조금 버겁다. 차 소리도 크고, 보도는 고르지 않고, 날씨는 습하다. 그런데 한 블록만 속도를 늦추면 다른 얼굴이 나온다. 대형 쇼핑몰 뒤편의 작은 국숫집, 운하를 따라 난 그늘진 길, 오후가 되면 문을 반쯤 닫는 오래된 상점들. 이런 곳에서 방콕은 훨씬 다정해진다.
사람 적은 방콕을 찾을 때 보는 것들
나는 방콕에서 장소를 고를 때 이름난 명소보다 시간대를 먼저 본다. 같은 골목도 오전 8시와 오후 2시, 저녁 7시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특히 시장은 너무 이른 시간에는 생활감이 진하고, 낮에는 조금 느슨해진다. 관광객이 많은 곳이라도 점심 직후나 비 오는 날에는 뜻밖에 조용해질 때가 있다.
- 숙소는 주요 역 바로 앞보다 한 골목 안쪽을 고르면 밤의 소음이 줄어든다.
- 유명 사원 근처라도 뒷길로 돌아가면 작은 카페와 생활 골목이 나온다.
- 대형 쇼핑몰을 들르더라도 식사는 주변 동네 식당에서 하는 편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 택시보다 도보 15분을 선택하면 지도에 없는 장면을 자주 만난다.
솔직히 이런 여행은 효율이 좋지는 않다. 하루에 유명한 곳을 여러 군데 찍고 오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대신 한 장소를 천천히 통과한다. 어느 집 앞에 신발이 몇 켤레 놓여 있는지, 학교 끝난 아이들이 어떤 음료를 들고 가는지, 동네 고양이가 어느 그늘에 앉아 있는지 같은 작은 것들이 여행의 중심이 된다.
타이항공이 어울렸던 순간들
타이항공을 타고 좋았던 건, 여행의 시작과 끝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방콕에서 돌아오는 날에도 공항에 너무 일찍 도착해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 그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여행이 끝난 뒤 바로 현실로 밀려나는 느낌보다, 조금 천천히 빠져나오는 느낌이 있었다.
기내 서비스가 완벽했다거나 모든 좌석이 특별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항공사는 날짜, 기종, 좌석 위치, 탑승객 상황에 따라 인상이 달라진다. 다만 내가 느낀 타이항공은 방콕이라는 도시의 첫인상과 제법 닮아 있었다. 친절하지만 과하지 않고, 분주하지만 어딘가 느슨한 구석이 있었다.
특히 로컬 여행을 좋아한다면 항공권을 고를 때 가격만 보지 않게 된다. 도착 시간이 너무 늦지는 않은지, 숙소까지 이동이 가능한지, 다음 날 아침을 망치지 않을 정도로 몸이 버틸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3만 원을 아끼고 첫날 밤을 통째로 잃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조금 더 편한 시간대의 항공편은 여행 첫날의 표정을 바꿔준다.
작은 여행을 위한 개인적인 선택 기준
나는 방콕에 다시 간다면 또 너무 유명한 곳부터 향하지는 않을 것 같다. 타이항공으로 도착해 공항철도를 타고, 역에서 한두 정거장 비껴난 동네에 짐을 풀고, 다음 날 아침에는 숙소 근처 노점에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싶다. 거창한 계획보다 그런 순서가 더 오래 남았다.
여행은 멀리 가는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낯선 동네의 생활 속으로 잠깐 걸어 들어가는 일에 가깝다. 타이항공은 내게 그 입구를 무리 없이 열어준 항공사였다. 방콕의 번쩍이는 장면보다, 골목 끝에서 본 젖은 보도와 따뜻한 국물 냄새가 아직 더 선명하다. 그래서 다음번에도 나는 조금 덜 유명한 길을 먼저 걸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