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KBO 기록실을 넘겨보다가 신인왕 후보 기록에서 손이 멈췄다. 그냥 “누가 제일 잘했다”로 끝낼 수 있는 판이 아니었다. 허인서는 포수라는 포지션의 무게를 등에 업고 시즌 전체를 끌고 왔고, 문정빈은 늦게 올라와 장타로 판을 흔들었고, 김민준은 고졸 선발 투수라는 희소성으로 표심을 건드리고 있다. 기록만 놓고 봐도 재밌는데, 그 기록이 만들어진 흐름까지 보면 더 복잡하다.
허인서, 가장 오래 앞서간 이름
허인서의 강점은 누적이다. 2026시즌 130경기 안팎을 소화하며 타율 0.283, 20홈런, 79타점, OPS 0.821 수준의 성적을 만들었다. 이 숫자가 더 크게 보이는 이유는 포수라는 포지션 때문이다. 포수는 매 경기 수비 부담이 크고, 투수 리드와 블로킹, 송구, 체력 관리까지 끌고 가야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20홈런을 때린 신인급 선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신인왕 투표에서는 임팩트도 중요하지만 “한 시즌을 얼마나 오래, 얼마나 꾸준히 1군 전력으로 버텼나”도 꽤 크게 작용한다. 허인서는 이 지점에서 가장 앞에 있다. 특히 한화가 시즌 내내 상위권 경쟁을 이어가는 흐름 속에서 주전 포수로 버틴 기록은 단순 타격 성적보다 더 무겁게 읽힌다.
다만 약점도 있다. 9월 말 이후 최근 10경기에서 타율이 1할대까지 떨어진 흐름은 표심에 미세한 흔들림을 줄 수 있다. 투표권자들이 시즌 전체를 본다면 여전히 유리하지만, 사람은 마지막 장면을 강하게 기억한다. 허인서에게 남은 변수는 성적의 절대값보다 막판 체감 온도다.
문정빈, 짧고 굵게 터진 장타의 힘
문정빈은 허인서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신인왕 레이스에 들어왔다. 시즌 중반 이후 존재감이 커졌고, 90경기 안팎에서 타율 0.274, 18홈런, 65타점, 장타율 0.531 수준의 성적을 찍었다. OPS도 0.88 안팎으로, 타석당 생산성만 보면 세 후보 중 가장 강하게 보이는 구간이 있다.
사실 문정빈의 기록은 “누적이 부족한데도 무시하기 어렵다”는 쪽에 가깝다. 326타석 정도에서 18홈런이면 파워 효율이 확실하다. 특히 LG 타선에서 4번까지 맡았다는 건 단순히 유망주가 반짝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팀이 중요한 순간에 그를 중심 타선에 세웠고, 문정빈은 그 기대에 꽤 자주 응답했다.
문제는 역시 경기 수와 타석 수다. 신인왕 투표에서 후반기 폭발은 강력한 무기지만, 앞서 달려온 후보를 뒤집으려면 차이가 선명해야 한다. 문정빈이 20홈런 고지를 밟고 OPS 격차를 더 벌렸다면 판이 더 시끄러워졌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늦게 나온 선수는 불리하다”는 공식을 흔든 시즌으로 남을 만하다.
김민준, 고졸 선발이라는 강력한 서사
김민준의 카드는 희소성이다. 고졸 신인이 1군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가 91이닝 안팎을 던지고 9승 3패, 평균자책점 3.56, WHIP 1.18 수준을 기록했다. 신인 투수가 불펜에서 몇 차례 인상적인 공을 던지는 것과 선발로 꾸준히 이닝을 먹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특히 후반기 흐름이 좋았다. 7월 말 이후 최근 10경기에서 59이닝 이상을 던지며 6승 1패, 평균자책점 3점대 초반을 기록한 흐름은 상당히 강하다. 시즌 초반보다 후반으로 갈수록 안정됐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어린 투수가 리그에 적응하며 점점 좋아지는 그림은 투표에서 꽤 좋은 인상을 남긴다.
김민준이 10승을 채웠다면 이야기는 더 뜨거워졌을 가능성이 크다. KBO에서 고졸 신인 선발의 두 자릿수 승리는 숫자 이상의 상징성이 있다. 물론 승수는 타선 지원과 불펜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도 투표에서는 여전히 강한 언어다. 김민준은 기록의 세련됨보다 “이 나이에 이 역할을 했다”는 문장이 더 세게 꽂히는 후보다.
세 후보를 같은 잣대로 보면
- 허인서: 포수로 시즌을 길게 버틴 누적, 20홈런, 중심 전력 가치가 강점이다.
- 문정빈: 타석당 장타 생산성과 후반기 임팩트가 가장 선명하다.
- 김민준: 고졸 선발 투수로 이닝과 승수를 쌓은 희소성이 크다.
이 3파전이 흥미로운 건 세 선수가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허인서는 포지션 가치와 누적, 문정빈은 공격 생산성, 김민준은 나이와 역할의 난도로 승부한다. 그래서 단순히 WAR 한 줄, OPS 한 줄, 평균자책점 한 줄로 재단하기가 어렵다. 야구 기록은 숫자처럼 보이지만, 결국 숫자가 놓인 자리까지 같이 읽어야 맛이 난다.
내 표를 하나만 던져야 한다면 아직은 허인서 쪽에 무게를 두고 싶다. 포수로 130경기 가까이 버티며 20홈런을 만든 시즌은 흔하지 않다. 다만 문정빈의 장타율과 김민준의 후반기 선발 안정감도 그냥 들러리로 보기엔 너무 세다. 올해 신인왕 레이스는 누가 받느냐 못지않게, 세 선수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신인답지 않은 시즌”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오래 회자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