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에 번진 한글 먹빛

영릉에 번진 한글 먹빛

훈민정음 반포 580돌을 기념하는 한글날인 2026년 10월 9일,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릉 영릉 일원에서 ‘아름다운 한글 먹빛 누리전’이 열렸다. 푸른 가을 하늘과 소나무 숲, 전통 한옥을 배경으로 한글 서예 작품이 펼쳐지면서 글씨와 자연, 전통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풍경을 만들었다.

이번 전시는 여주세종문화관광재단과 세종한글사랑이 주최한 ‘2026 제14회 세종대왕 전국 한글 휘호 대회’ 수상 작품전으로 마련됐다. 한글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예 전시를 중심으로 축사와 축하공연, 전통 찻자리 등이 이어지며 한글을 예술과 일상에서 폭넓게 살펴보는 자리가 됐다.

가을 영릉에 펼쳐진 한글 서예

전시 작품들은 실내 공간에 머물지 않고 영릉의 야외 풍경 속에 자리했다. 바람결에 가볍게 흔들리는 작품 뒤로 소나무와 한옥의 선이 이어졌고, 한지 위의 검은 글씨는 밝은 가을 햇살과 뚜렷한 대비를 이뤘다. 열린 공간에 나란히 걸린 작품들은 실내 전시와 다른 개방감과 운치를 드러냈다.

관람객들은 작품 앞에서 걸음을 늦추고 글씨의 형태와 문장의 의미를 차분히 살폈다. 힘차게 뻗은 굵은 획, 섬세하게 이어진 선, 넉넉한 여백을 활용한 구성이 작품마다 서로 다른 인상을 전했다. 일상에서 익숙하게 사용하는 한글이 붓의 움직임과 먹의 농담에 따라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검은 먹빛과 흰 한지의 조화는 한글이 뜻을 전달하는 문자인 동시에 독창적인 조형미를 지닌 예술의 소재라는 점을 보여줬다. 같은 글자도 획의 굵기와 속도, 글자 사이의 간격에 따라 힘찬 기운이나 부드러운 흐름을 나타냈다.

수십 미터 광목천에 흐른 향수

전통 한옥 건물 앞 잔디밭에는 긴 흰색 광목천이 펼쳐졌다. 천 위에는 정지용 시인의 대표작 ‘향수’ 전문이 수십 미터에 걸쳐 붓글씨로 쓰여 있었다. 관람객들은 잔디밭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글씨 옆을 걸으며 한글의 시각적인 리듬과 문학 작품의 흐름을 함께 마주했다.

잔디밭 한쪽에는 바람에 움직이지 않도록 돌을 얹은 대형 현수막도 놓였다. 현수막에는 ‘2026년 한글의 해 기념’ 문구와 함께 행사를 후원한 여주시와 여주세종문화관광재단의 이름과 로고가 표시됐다. 세종대왕과 한글을 중심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이어가는 여주의 행사 취지를 현장에서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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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의미 되새긴 기념행사

야외 무대 행사는 석재선 사회자의 진행으로 시작됐다. 세종한글사랑 김유영 회장은 청색 치마와 흰 저고리로 이뤄진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올라 한글날 기념 인사를 전했다. 한글 서예의 정법 지도와 한글 대중화 교육에 힘써온 김 회장은 한글 서예가 지닌 독창성과 예술성을 강조했고, 참석자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이어 이충우 여주시장이 한글날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무대 테이블 뒤에는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가 단아한 글씨로 적혀 있어 행사 주제와 조화를 이뤘다. 박두형 여주시의회 의장 등 지역 내빈도 소개됐으며, 참석자들은 한글 도시 여주의 비전과 지역 상생의 가치를 함께 되새겼다.

행사는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에서 출발한 한글의 의미를 오늘의 문화와 예술로 이어가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전시와 무대 프로그램은 문자로서의 실용성뿐 아니라 한글이 지닌 미적 가치까지 자연스럽게 조명했다.

북소리와 춤으로 표현한 한글

축하공연에서는 고즈넉한 한옥 기와 아래 화려한 용 문양과 오색 장식이 돋보이는 대북이 등장했다. 은은한 색의 한복 의상을 입은 연주자가 채를 들어 대북을 울리자 웅장한 소리가 영릉의 소나무 숲으로 퍼졌다. 정적인 서예 작품과 힘찬 북소리가 대비를 이루며 야외 행사의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북 공연에 이어 세 명의 무용수가 한글의 아름다움을 춤으로 표현했다. 힘 있고 역동적인 동작과 부드럽게 이어지는 춤사위는 한글 획의 흐름을 신체 움직임으로 옮긴 듯한 장면을 만들었다. 붓으로 그은 선을 연상시키는 몸짓이 이어지면서 전시의 주제가 공연예술로 확장됐다.

먹으로 표현한 글씨와 북의 울림, 무용수의 움직임은 서로 다른 예술 형식이었지만 한글의 선과 리듬을 중심으로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다. 관람객들은 눈앞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서 더 나아가 소리와 동작을 통해 한글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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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향 뒤에 이어진 전통 찻자리

한글 작품과 축하공연을 감상한 뒤에는 전통 찻자리가 이어졌다. 파란 천막 아래 마련된 체험 공간에는 ‘먹빛 깊은 사랑, 차향으로 피어나다’라는 문구와 한복을 입고 차를 우리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 배치됐다. 먹빛의 깊이와 차향의 여유를 연결한 공간은 관람객들이 잠시 쉬며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장소가 됐다.

흰 레이스 천이 깔린 긴 테이블에는 백자 다기와 도자기 주전자가 가지런히 놓였다. 꽃잎을 띄운 맑은 찻물은 커다란 백자 대접에 담겼고, 다도 시연자들은 정돈된 동작으로 찻잔을 채웠다. 시민들은 따뜻한 연잎차를 맛보며 서예 작품과 공연에서 받은 인상을 나눴다.

현장에 마련된 서예전 도록에는 전국 서예가들의 작품과 수상작이 담겼다. 야외에 펼쳐진 작품이 자연 속에서 생동감을 보여줬다면, 도록은 대회의 성과와 수상 작품을 정리해 기록의 의미를 더했다.

오늘의 예술로 살아 있는 우리글

한글은 세종대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창제한 문자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보다 쉽게 표현하고 서로 소통하도록 한 창제 정신은 한글날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 핵심 가치다.

영릉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한글이 과거의 문화유산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의 예술과 생활 속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붓글씨는 문학과 만났고, 야외 전시는 자연과 어우러졌으며, 북과 춤은 한글의 리듬을 무대 위 움직임으로 표현했다. 전통 찻자리는 관람객들이 행사의 여운을 나누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아름다운 한글 먹빛 누리전’은 우리글의 실용성과 예술성,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을 한자리에서 되새긴 문화행사였다. 소나무 숲 사이로 이어진 먹빛 작품과 한옥의 풍경은 한글이 세대를 넘어 계승해야 할 문자이자 현재에도 새롭게 표현되는 문화라는 점을 전했다.

영릉에 번진 한글 먹빛
영릉에 번진 한글 먹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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