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한화의 시즌 기록을 다시 보다가 57승 83패 4무라는 숫자에서 한참 멈췄다. 144경기를 치러 승률 0.407, 최종 9위. 한 경기의 아쉬운 장면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긴 시즌이었다. 그래서 10월 16일 류지현 신임 감독의 취임 기자회견에서 가장 귀에 들어온 말도 우승 약속이 아니었다. 한화에 보이는 빈틈을 하나씩 채우겠다는 이야기였다.
57승 뒤에 남은 질문을 먼저 꺼냈다
류 감독은 한화의 제15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계약 기간은 3년, 총액은 20억 원이다. 새 감독이 처음 마이크를 잡으면 분위기를 띄우는 말이 앞서기 쉽다. 그런데 그는 올해 팀이 어려웠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투수진의 역할부터 짚었다. 선발과 중간 계투, 경기 후반을 맡을 투수들의 자리가 뚜렷하지 않아 혼선이 있었다는 진단이다.
이 대목이 작심발언처럼 들린 이유는 선수 개인의 분발만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어느 상황에서 던질지 정해지지 않으면 투수는 준비 방식부터 흔들린다. 감독도 매 경기 급한 불을 끄느라 같은 선수를 다른 역할에 쓰기 쉽다. 실제 운용이 얼마나 달라질지는 지켜봐야 하지만, 류 감독은 적어도 문제의 출발점을 선수의 의지보다 보직과 운영 방식에서 찾았다.
물론 57승이라는 결과를 투수 보직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부상과 타선, 수비까지 함께 봐야 한다. 류 감독 역시 시즌 초반 부상자가 나온 사정을 언급했다. 취임 첫날의 진단은 원인 분석의 완성본이라기보다, 먼저 손댈 곳을 밝힌 말에 가깝다.
야수 포지션도 캠프에서 답을 찾는다
야수 쪽에서는 포지션이 겹치는 문제를 꺼냈다. 비슷한 자리에 선수가 몰려 있으면 단순히 한 명을 고르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누가 주전으로 꾸준히 나갈지, 다른 자리를 맡을 수 있는지, 교체 자원을 어떻게 쓸지까지 이어진다. 타순의 연결과 경기 후반 수비 배치도 그 선택에 영향을 받는다.
류 감독은 일본 미야자키 캠프와 이후 멜버른 캠프를 거치며 최적의 조합을 찾겠다고 했다. 여기서 팬이 볼 지점은 캠프의 좋은 장면 몇 개보다 출전 위치와 역할이 얼마나 일관되게 잡히는가다. 젊은 선수가 많은 팀이라면 더 그렇다. 기회가 늘어나는 것만큼 자신이 어떤 역할로 경쟁하는지 아는 일도 중요하다.
그는 자유계약선수 보강에 관해서는 아직 구단과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먼저 젊은 선수들의 성장 가능성과 부족한 자리를 보고 이야기하겠다는 순서다. 당장 영입할 이름을 기대한 팬에겐 답답할 수 있다. 그래도 현재 선수단에서 채울 수 있는 자리와 외부 보강이 필요한 자리를 구분해야 투자도 분명해진다.
데이터를 말했지만 숫자를 앞세우진 않았다
류 감독은 계약 후 사흘 동안 한화 선수들의 세부 지표를 아직 충분히 들여다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대신 전력분석팀과 약 한 시간 동안 만나 기존 자료와 자신의 생각을 나눴다고 설명했다. 취임식에서 특정 수치를 근거로 선수를 평가하지 않은 건 이 시점에 맞는 태도라고 느꼈다. 기록은 유용하지만, 쓰임새를 정하려면 실제 보직과 코치진의 판단도 함께 맞춰야 한다.
내가 보고 싶은 건 데이터라는 단어의 등장 횟수가 아니다. 예를 들어 선발투수를 언제 내릴지, 접전에서 어느 불펜을 먼저 쓸지, 야수의 수비 위치를 어떻게 정할지 같은 선택이 시즌 내내 납득할 만한 기준을 따르는가다. 류 감독이 말한 시스템 야구도 그런 장면에서 드러날 것이다. 감독의 감각에만 기대지 않고 구단의 방향이 경기 운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대표팀에서 거둔 성과는 기대를 키운다. 류 감독은 202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8강 진출과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이끌었다. 다만 대표팀의 짧은 대회와 프로 구단의 144경기 시즌은 리듬이 다르다. 그 경험이 한화 선수단의 긴 시즌 운영에 어떻게 녹아들지는 이제부터 확인할 일이다.
2027시즌의 첫 장면은 이미 시작됐다
류 감독은 취임식 다음 날인 10월 17일 시작하는 훈련을 2027시즌의 출발로 봤다. 10월 말부터 이어질 미야자키 훈련에도 그 의미를 실었다. 취임 첫날의 말이 공허해지지 않으려면 이때 정한 역할이 다음 캠프와 개막 후 경기 운영까지 이어져야 한다. 훈련장에서의 실험이 실전에서 반복될 때 비로소 팀의 방식이 된다.
우승에 관한 발언도 같은 맥락이었다. 류 감독은 최근 우승팀들이 여러 해 상위권에 머문 뒤 기회를 잡았다는 점을 들며 지속적으로 강한 팀을 만들겠다고 했다. 9위로 시즌을 끝낸 한화에 곧바로 정상의 시간을 약속한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 현실적인 거리감이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내년 봄에는 승패만큼이나 투수 보직과 야수 배치가 얼마나 선명해졌는지 먼저 보게 될 것 같다. 취임 첫날 드러낸 문제의식이 그라운드에서도 보인다면, 한화의 숫자에도 다른 이야기가 붙기 시작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