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제주 여행 일정을 짜다가 저장해 둔 장소를 세어 봤다. 바다, 숲, 시장, 전시관까지 하루에 다섯 곳. 지도에 찍어 놓으니 놀러 가는 건지 이동하러 가는 건지 헷갈렸다. 제주도놀거리는 생각보다 많아서, 뭘 더 넣을지보다 어디를 뺄지가 먼저였다.
그래서 장소를 유명한 순서로 고르지 않고 날씨와 지역별로 묶어 봤다. 걷고 싶은 날, 바람이 센 날, 비가 오는 날에 쓸 수 있는 선택지를 하나씩 남기는 방식이다. 실제 방문 후기라기보다 공식 관광 안내를 확인하며 짠 일정표에 가깝지만, 무리한 동선을 걸러 내는 데는 꽤 쓸 만했다.
서쪽 바다가 보고 싶다면 한담에서 천천히
애월 쪽에서는 한담해안산책로를 먼저 골랐다. 비짓제주 안내에 따르면 애월항에서 곽지과물해변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이 약 1.2km다. 길 자체가 길지 않아 바다를 보러 갔다가 걷는 일까지 숙제처럼 느껴질 가능성이 적다. 검은 현무암 옆으로 바다가 붙어 있는 풍경도 제주에 왔다는 기분을 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여기서 욕심내기 쉬운 게 일몰 시간이다. 서쪽이라 해 질 무렵이 끌리지만, 일몰 하나에 맞춰 하루 전체를 끌고 가면 다른 일정이 빡빡해진다. 나는 애월에서 식사하거나 쉬는 날에 산책로를 붙이는 편이 낫겠다고 적었다. 바람이 너무 세면 짧게 걷고 돌아설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해안의 바위 쪽으로 내려가는 대신 조성된 길을 따라 걷는 정도가 편하겠다.
숲을 고른 날에는 사려니숲길 입구부터 확인
바다만 계속 보면 풍경이 비슷해질 것 같아 숲길도 하나 넣었다. 사려니숲길은 전체가 약 10km로 안내된다. 이름만 보고 가볍게 한 바퀴 돌 수 있는 산책로라고 생각하면 일정이 꼬일 수 있다. 어느 입구로 들어가서 어디까지 걷고 돌아올지 먼저 정해야 한다.
특히 차를 가져간다면 주차 위치가 중요하다. 비짓제주는 비자림로 쪽 입구 주변에 별도 주차 공간이 없어 남조로변 붉은오름 입구 쪽 주차장 이용을 안내한다. 이 정보 하나로 내 일정표도 바뀌었다. 목적지를 막연히 ‘사려니숲길’이라고 적는 대신 ‘붉은오름 입구에서 걷다가 돌아오기’로 적어 둔 것이다. 물찻오름은 평소 출입이 제한되고, 악천후에는 숲길도 통제될 수 있으니 당일 안내를 확인하는 게 좋다.
숲에서는 얼마나 멀리 갔느냐보다 돌아올 힘을 남겼느냐가 만족도를 가를 것 같다. 걷는 시간이 짧아도 삼나무 사이에서 한참 머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편한 신발과 마실 물은 챙기고, 비 온 뒤라면 흙길 상태도 살펴야겠다.
용머리해안은 시간보다 입장 가능 여부가 먼저
서귀포 쪽에서 가장 눈길이 간 곳은 용머리해안이다. 층층이 드러난 절벽 사이를 걷는 장소라 사진만으로도 바닷가 산책과는 느낌이 다르다. 비짓제주에는 탐방에 약 30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그런데 소요 시간보다 더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만조와 높은 파도, 날씨에 따라 관람 시간이 달라지거나 출입이 막힐 수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오전에 용머리해안, 점심 뒤 다른 장소를 넣으려 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곳을 하루의 고정 출발점으로 삼으면 통제되는 순간 일정 전체가 흔들린다. 서귀포에 머무는 날 후보로 두고, 출발 전에 서귀포시 공영관광지의 당일 안내를 확인하는 쪽이 현실적이다. 현장 통제가 있다면 억지로 기다리기보다 주변에서 식사하고 쉬는 시간으로 돌릴 생각이다.
비가 오면 원도심 전시와 시장을 한 묶음으로
제주에서는 야외 장소만 적어 두면 비 오는 날 선택지가 급격히 줄어든다. 그래서 제주시 원도심에 실내 일정 하나를 남겼다.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은 산지천 근처의 현대미술 공간이고, 동문재래시장과도 가까운 편이다. 전시를 보고 시장에서 간식을 고르는 흐름이면 비가 잠시 잦아들 때 움직이기도 수월하겠다.
동문시장은 낮의 시장과 저녁 야시장 분위기가 다르다고 비짓제주가 소개한다. 다만 시장이라고 해서 비를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출입구를 오가거나 줄을 서는 동안은 우산이 필요할 수 있다. 먹거리는 미리 여러 개를 정해 두기보다 현장에서 끌리는 것 한두 가지만 고르려 한다. 줄이 긴 가게를 모두 따라가다 보면 시장 구경보다 대기 시간이 더 길어질 테니까.
이렇게 고르니 하루에 몇 군데를 ‘완료’했는지는 덜 중요해졌다. 바다를 걷는 날은 바다에 시간을 쓰고, 숲을 가는 날은 돌아오는 길까지 여유를 남기는 편이 내 여행에는 맞겠다. 제주도놀거리를 찾다가 오히려 비워 둔 시간이 가장 기대되는 건 조금 재미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