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친구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그, 거시기 있잖아요”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옆자리에서 곧바로 “선생님 앞에서 사투리 쓰면 안 되지”라는 말이 나왔지요. 여러 지역에서 익숙하게 듣는 말이라 사투리로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거시기’는 표준어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쓰임을 먼저 보고, 표기가 어떻게 정해졌는지 따라가면 좋습니다.
거시기는 표준어일까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거시기’가 대명사와 감탄사로 올라 있습니다. 여기서 조심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사전에 실렸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말이 표준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전에는 방언이나 옛말, 잘못된 표기도 함께 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시기’는 그런 비표준어 표시 없이 풀이되어 있고, 표준어 규정에도 표준형으로 제시됩니다.
규정은 표기를 더 분명히 보여 줍니다. 표준어 사정 원칙 제4항은 거센소리로 나지 않는 형태를 표준어로 삼는 사례로 ‘거시기’를 들고, ‘거시키’는 버리는 형태로 적었습니다. 끝소리가 ‘기’인 거시기가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지역 말처럼 들리는지와 표준어인지는 별개의 판단입니다.
1988년에 공포된 표준어 규정의 해설도 이 대목을 짚습니다. ‘거시키’보다 ‘거시기’가 이미 오래전부터 널리 쓰였고, 규정에서 그 형태를 확인했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니 ‘최근에 사투리가 표준어로 승격됐다’고 말하면 변화의 시점을 잘못 전하게 됩니다. 적어도 이 규정이 마련될 때에는 이미 ‘거시기’를 기준형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름 대신 쓰는 말과 머뭇거리는 소리
같은 ‘거시기’라도 문장 안에서 맡는 일이 다릅니다. “우리 동창 거시기 말이야, 키가 큰 친구”라고 하면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서랍에 있던 거시기 좀 가져다줘”에서는 물건의 이름을 대신하지요. 이렇게 사람이나 사물을 가리킬 때 사전은 ‘거시기’를 대명사로 풀이합니다.
반면 “저, 거시기,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에서는 특정한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말을 꺼내기 조심스럽거나 다음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 잠시 머뭇거리는 소리입니다. 이때는 감탄사로 봅니다. 앞의 예에서는 ‘거시기가’, ‘거시기를’처럼 조사를 붙여 문장 성분으로 쓸 수 있지만, 뒤의 예에서는 그 자리에 조사를 붙이기 어렵습니다. 뜻이 막연해 보여도 쓰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이 차이를 설명할 때 저는 잃어버린 이름이 있는지부터 묻습니다. “그 거시기가 어제 왔어”라면 떠올리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시기, 잠깐만요”라면 아직 꺼내지 못한 말이 있을 뿐입니다. 듣는 사람이 앞뒤 상황으로 빈자리를 채운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문장 속 역할은 같지 않습니다.
왜 거시키가 아니라 거시기일까요?
‘거시기’의 표기를 외울 때 ‘사투리니까 대충 들리는 대로 쓰면 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헷갈립니다. 기준은 발음의 분위기가 아니라 표준어 사정 원칙에 있습니다. 이 원칙의 제4항은 ‘거시기·거시키’처럼 거센소리가 있는 형태와 없는 형태가 나란히 쓰일 때, 제시된 말에서는 거센소리 없는 형태를 표준형으로 정합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거시기’로 적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단어에서 거센소리를 빼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표준어 규정에는 반대로 거센소리가 있는 형태를 택한 사례도 있습니다. 개별 낱말의 쓰임을 보고 정한 기준이므로, ‘거시기’에서 확인한 답을 다른 단어에 기계적으로 옮기면 안 됩니다.
또 하나, 표준형이 정해진 까닭과 단어가 맨 처음 생긴 경위는 구별해야 합니다. 표준어 규정은 ‘거시기’와 ‘거시키’ 가운데 어느 형태를 기준으로 삼는지 설명합니다. 그 설명만으로 ‘거시기’가 어떤 옛말에서 갈라져 나왔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유래를 이야기할 때 근거가 닿는 자리까지만 말하는 편이 오래 기억하는 데에도 낫습니다.
표준어라도 아무 자리에서나 어울릴까요?
‘거시기’가 표준어라는 사실과 글에서 언제 쓰는 게 좋은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친구와 대화하며 이름이 잠깐 생각나지 않을 때는 자연스럽습니다. 소설에서 인물의 말투를 살리거나, 말하기를 주저하는 장면을 보여 줄 때도 제 몫을 합니다. 반대로 안내문에 “거시기를 제출하세요”라고 쓰면 독자는 무엇을 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문서에서는 ‘신청서’, ‘영수증’처럼 대상을 밝혀야 합니다.
수업에서도 저는 학생이 “거시기”라고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을 끊지 않습니다. 먼저 무엇을 가리키는지 함께 찾고, 글로 옮길 때는 독자에게 필요한 이름을 적게 합니다. 말의 자격과 표현의 정확성은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투리처럼 들리는 익숙한 말 하나에도 쓰임과 표기의 기준이 들어 있습니다. ‘거시기’를 들을 때 그 빈자리에 무엇이 있는지 떠올려 보면, 이 말이 왜 지금까지 쓰이는지도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