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에 장흥 관산읍을 지날 때면 천관산 쪽으로 눈이 먼저 갔다. 억새를 보러 가는 날에도 마음에 남는 건 정상 사진보다 산 아래 동네의 느린 아침이다. 전남 억새 명소를 찾는다면 천관산은 빼놓기 어렵다. 다만 조용한 여행을 좋아한다면 이 산이 가을마다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다는 사실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관산읍을 지나 산으로 가는 아침
천관산은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 사이에 있다. 차로 간다면 관산읍을 지나 장천재 쪽 들머리를 목적지로 잡는 편이 길을 이해하기 쉽다. 읍내에서 필요한 물과 간식을 챙기고 산으로 들어가면 된다. 산 위에서 뭘 먹을지 고민하며 가게를 찾는 것보다, 출발 전에 준비하는 쪽이 마음이 편하다.
나는 억새가 유명하다는 말만 듣고 떠나는 여행보다 동네를 한 번 지나가는 여행이 좋다. 읍내의 가게 문이 하나둘 열리는 시간과 등산객이 모이는 시간이 조금 다르다. 차를 잠시 세울 곳을 찾거나 골목을 걸을 때는 주민의 통행을 먼저 살피게 된다. 낯선 사람에게는 여행지여도 누군가에게는 매일 오가는 길이니까.
천관산 정상인 연대봉은 해발 723m다. 숫자만 보고 가볍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억새가 펼쳐진 능선을 만나려면 산길을 올라야 하고, 바위가 드러난 구간에서는 발을 잘 디뎌야 한다. 동네 산책처럼 운동화 한 켤레만 신고 나서기보다 접지력 있는 신발과 물을 챙기는 게 낫다.
억새는 연대봉과 환희대 사이에서 만난다
천관산 억새의 중심은 연대봉에서 환희대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산림청도 이 구간의 억새평원을 천관산 가을 풍경으로 소개한다. 장천재에서 출발하는 길은 여러 갈래라 현장 안내판에서 현재 이용할 수 있는 탐방로를 확인하고 걸으면 된다. 나는 처음부터 걷는 속도를 늦추는 편이 좋았다. 아래에서는 숲길과 바위가 이어지고, 높이 오를수록 시야가 열리기 때문이다.
능선에 서면 억새가 사진 속처럼 한 가지 색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햇빛을 정면으로 받을 때는 연한 갈색에 가깝다가, 빛이 뒤로 넘어가면 꽃이 핀 끝부분이 은빛으로 보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한쪽으로 눕는 줄기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번갈아 바라보게 된다. 한국관광공사는 천관산 억새가 9월 중순쯤 피기 시작해 10월 중순에 풍성해진다고 안내한다. 해마다 날씨가 다르니 날짜 하나에 풍경을 맞춰 기대하지는 않는 게 좋다.
솔직히 이곳을 숨은 장소라고 부를 수는 없다. 억새철 주말, 특히 행사가 있는 날에는 조용한 능선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 적은 시간을 원한다면 평일 이른 시간에 걷는 편이 낫다. 그렇다고 아침이면 반드시 한적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날씨와 방문객 수는 매번 달라진다. 나는 능선에 올라서도 가장 넓게 보이는 자리만 고집하지 않고, 탐방로 안에서 잠시 멈출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사진 한 장보다 바람 소리를 오래 듣고 싶은 날이 있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더 천천히
정상에 닿으면 억새만 보다가 놓친 풍경이 뒤늦게 들어온다. 천관산에는 바위 봉우리가 많고, 맑은 날에는 남해안의 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런데 날이 흐리다고 헛걸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까운 억새가 더 또렷해지고, 멀리 보이는 풍경 대신 발밑의 흙과 풀을 살피며 걷게 된다.
내려오는 길에는 오를 때보다 무릎과 발목에 신경이 쓰인다. 억새를 보고 마음이 급해져도 바위나 젖은 흙에서는 속도를 줄이는 게 좋다. 해가 짧아지는 계절이니 산 아래로 돌아올 시간도 넉넉히 잡아야 한다. 억새 사이로 사진을 찍으러 들어가는 모습은 피하고 싶다. 가까이에서 찍은 한 컷보다 다음 사람도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는 풍경이 오래 남는다.
산 아래의 평범한 시간이 좋았다
산행을 마친 뒤 곧장 다음 명소로 이동하면 천관산은 사진 몇 장으로만 남기 쉽다. 관산읍 쪽으로 돌아와 늦은 식사를 하고, 골목을 조금 걷는 시간이 나는 더 좋았다. 산에서는 바람 때문에 말을 아꼈는데, 내려오니 가게 안의 작은 소리와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억새를 보러 왔다가 동네의 오후까지 보게 되는 셈이다.
전남 억새 명소라는 이름에 기대하면 천관산의 가장 화려한 한 장면만 떠올릴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쪽은 그 앞뒤다. 읍내에서 물을 챙기던 아침, 능선에서 바람을 기다리던 잠깐, 산을 내려와 다시 평범한 길을 걷던 시간. 억새는 계절이 지나면 모습을 바꾸지만 그 하루의 속도는 오래 기억에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