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 남해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자꾸 생각나는 건 바다를 내려다본 전망대보다 지족마을의 조용한 골목이었다. 창선교를 건너 차를 세우고 걷는데, 열린 가게보다 닫힌 문이 더 많았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급하게 다음 장소로 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날은 지족에서 물건마을로, 이튿날에는 미조항으로 갔다. 세 곳 모두 바다를 끼고 있지만 걷는 기분은 조금씩 달랐다.
창선교 아래에서 시작한 느린 걸음
지족마을에서는 죽방렴을 먼저 찾았다. 지족해협의 물살을 이용해 대나무 발로 물고기를 잡는 방식이라는데, 멀리서 보면 바다 위에 선들이 가지런히 그어진 듯하다. 창선교 주변에서 그 모습을 보고 나서 항구 쪽 길을 걸었다. 차로 지나갈 때는 금방 끝나는 동네였는데, 걸으니 배를 묶어 둔 자리와 낮은 집들 사이로 이어지는 길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 바닷가라고 늘 텅 빈 것은 아니다. 작업하는 분들이 오가는 길이어서 사진을 찍으려고 길 한가운데 오래 서 있지는 않았다. 항구 가까이에서 20분쯤 걷고 돌아왔는데, 죽방렴을 가장 잘 보이는 각도보다 그 곁에서 흘러가는 마을의 시간이 더 오래 남았다. 바람을 막아 줄 모자 하나만 있어도 천천히 걷기가 한결 편하다.
물건마을에서는 숲을 따라 바다를 봤다
물건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곧장 해안으로 내려가지 않고 방조어부림을 따라 걸었다. 바닷바람을 막아 온 나무들이 길게 이어지고, 숲 바깥에는 몽돌이 놓인 해안이 있다. 독일마을이 가까워서 이 일대가 온통 붐빌 줄 알았는데, 숲길에서는 발밑의 마른 잎과 파도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다만 시간대와 날씨에 따라 분위기는 달라질 수 있겠다.
솔직히 이곳은 ‘아무도 모르는 곳’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유명한 장소의 입구를 지나 마을 안쪽과 숲 가장자리를 천천히 걸으면 다른 얼굴이 보인다. 나는 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잠깐 쉬었다가 항구 쪽으로 돌아왔다. 몽돌 위는 발이 쉽게 흔들려 오래 걷지 않았고, 파도가 가까워지는 날에는 물가로 내려가지 않는 편이 마음 편하다. 짧은 산책이라도 운동화가 잘 어울리는 길이었다.
미조항의 저녁은 관광보다 생활에 가까웠다
다음 날 미조항에서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방파제가 보이는 쪽으로 걸었다. 배가 드나드는 항구에서는 누구에게나 여행자의 속도를 내달라고 할 수 없다. 길을 비켜 주고, 작업하는 공간에는 들어가지 않으며, 앉을 자리가 나오면 잠시 바다를 봤다. 물건마을에서 보았던 숲의 곡선과 달리 이곳에는 밧줄과 배, 낮은 건물이 가까이 있었다.
오후가 기울자 바람이 손끝에 금세 닿았다. 겨울 남해는 햇볕 아래에서는 걷기 좋다가도 그늘이나 바닷바람 앞에서는 금방 추워진다. 얇은 옷을 여러 겹 입고 갔더니 걷다가 더우면 한 겹 벗기 쉬웠다. 항구에서 오래 머물 생각이라면 따뜻한 음료를 챙기는 것도 좋겠다. 나는 문을 연 식당을 보고 그날 저녁을 정했다. 겨울에는 작은 가게의 영업시간이 달라질 수 있으니, 꼭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출발 전에 확인하는 게 낫다.
한적한 남해를 걷고 싶다면 남길 시간
이 동선은 차가 있으면 이어 가기 편하다. 대중교통으로 움직인다면 세 마을을 하루에 묶기보다 한두 곳에 시간을 넉넉히 주는 쪽이 좋겠다. 버스 시간은 계절과 요일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남해공용터미널이나 남해군 안내를 확인해야 한다. 겨울에는 해가 짧아 해안길을 걸을 시간을 낮에 먼저 잡는 편이 편안했다.
- 지족마을에서는 창선교 주변에서 죽방렴을 보고 항구 골목을 걷기
- 물건마을에서는 방조어부림 숲길과 몽돌해안을 천천히 둘러보기
- 미조항에서는 작업하는 분들의 동선을 피해 항구의 오후를 보내기
세 곳을 모두 돌아보니 겨울 남해 여행의 좋은 점은 유명한 장면을 많이 모으는 데 있지 않았다. 바람 때문에 걷는 속도를 늦추고, 문 닫은 가게 앞을 지나고, 마을의 하루에 잠깐 자리를 내어 보는 것. 내게는 그런 시간이 남해의 겨울을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