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스터리에서 볶은 지 하루 된 원두를 건네면 손님이 묻곤 합니다. “이렇게 신선한데 바로 마시면 제일 맛있겠죠?” 향은 분명 좋습니다. 그런데 그날 에스프레소를 뽑으면 크레마가 크게 부풀고, 같은 분쇄도로 내려도 맛이 자꾸 달라질 때가 있습니다. 갓 볶은 원두가 아직 가스를 많이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개싱은 로스팅 중 생긴 이산화탄소가 원두 밖으로 빠져나오는 과정입니다. 기다리는 목적은 가스를 전부 없애는 게 아니라 추출을 방해할 만큼 많은 시기를 지나, 맛이 안정되는 때를 찾는 데 있습니다. 원두 디개싱방법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로스팅 날짜를 확인하고, 봉투를 제대로 보관하며, 며칠 간격으로 같은 조건에서 내려 보면 됩니다.
먼저 로스팅 날짜와 추출 기구를 함께 봅니다
제가 매장에서 출발점으로 잡는 기간은 핸드드립용 중강배전 원두가 로스팅 후 2~5일, 약배전 원두가 4~10일입니다. 에스프레소는 압력을 걸어 짧은 시간에 추출하므로 조금 더 기다립니다. 중강배전은 5~10일, 약배전은 10~21일을 첫 점검 구간으로 봅니다. 모두 달력에 박아 둘 정답은 아닙니다. 같은 산지라도 볶는 방식과 원두의 밀도, 포장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강하게 볶은 원두는 대체로 가스가 빨리 빠집니다. 오래 기다리면 진한 향이 먼저 둔해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밝게 볶은 원두는 며칠 뒤 단맛과 향의 윤곽이 더 또렷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봉투에 적힌 ‘로스팅 후 7일’ 같은 숫자 하나보다, 내가 어떤 기구로 마실지를 먼저 떠올리는 편이 정확합니다.
봉투를 열어 두는 것은 디개싱이 아닙니다
가스를 빼야 한다고 원두 봉투를 며칠씩 열어 두는 분이 있습니다. 그 사이 산소와 습기에도 계속 노출됩니다. 향이 빠지는 속도까지 빨라지는 셈이지요. 배출 밸브가 달린 봉투라면 밀봉한 상태로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 두면 됩니다. 밸브는 안쪽 가스가 나갈 길을 마련해 줍니다. 일부러 눌러서 가스를 빼거나 매일 봉투를 열어 향을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밸브가 없는 봉투라도 입구를 단단히 닫고, 가스 때문에 봉투가 지나치게 팽팽해지면 잠깐 열었다가 다시 닫으면 됩니다. 직사광선이 드는 창가, 열이 오르는 커피 머신 옆은 피합니다. 냉장고는 꺼낼 때 생기는 온도 차와 주변 음식 냄새가 신경 쓰여 권하지 않습니다.
한 달 이상 뒤에 마실 원두라면 마실 양만큼 나눠 밀폐한 뒤 냉동하는 편이 낫습니다. 냉동은 디개싱을 완료하는 방법이 아니라 변화를 늦추는 보관 방법입니다. 꺼낸 원두는 용기 겉면의 물기가 원두에 닿지 않도록 밀봉한 채 실온에 두었다가 사용합니다. 자주 여닫는 큰 통 하나보다 소분한 봉지가 편합니다.
드립에서는 뜸 들일 때 가스의 흔적이 보입니다
핸드드립을 할 때 원두 15g에 물 240g을 쓴다면, 처음에는 30~45g만 붓고 30~45초 기다려 봅니다. 이때 분쇄한 커피가 크게 부풀고 기포가 활발하게 올라오면 가스가 아직 많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가스가 물길을 밀어내면 일부 가루가 충분히 젖지 않아 추출이 들쭉날쭉해집니다.
다만 봉긋하게 부풀지 않는다고 오래된 원두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로스팅 정도, 분쇄도, 물을 붓는 방식에 따라서도 모양이 달라집니다. 눈으로 본 기포보다 잔에서 느껴지는 맛이 우선입니다. 볶은 지 이틀 된 원두가 시고 향이 거칠게 느껴졌다면, 같은 원두를 이틀쯤 뒤에 같은 레시피로 다시 내려 보세요. 물 온도와 분쇄도를 함께 바꾸면 무엇 때문에 맛이 달라졌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제가 보통 시작하는 물 온도는 중배전 기준 92~94℃입니다. 그런데 가스가 많은 원두를 더 진하게 뽑겠다고 온도부터 올리면 거친 맛이 커질 수 있습니다. 먼저 며칠 기다려 보고, 그다음에도 맛이 비면 분쇄도를 조금 더 곱게 조절하는 순서가 판단하기 쉽습니다.
에스프레소는 같은 레시피를 며칠 기록해 봅니다
에스프레소에서는 가스가 추출의 일관성에 더 눈에 띄게 영향을 줍니다. 볶은 지 얼마 안 된 원두로 18g을 담아 36g을 뽑았는데, 한 잔은 24초, 다음 잔은 35초가 걸릴 수 있습니다. 크레마는 풍성해 보여도 마시면 맛이 날카롭거나 속이 빈 듯할 때가 있지요. 크레마의 양만으로 잘 뽑혔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저라면 같은 원두를 하루나 이틀 간격으로 18g 투입, 36g 추출을 기준 삼아 마셔 봅니다. 추출 시간은 대략 25~35초를 출발점으로 두되, 숫자를 맞추느라 분쇄도를 계속 크게 바꾸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조금 달라도 단맛이 살아나고 신맛과 쓴맛이 고르게 느껴지는 날이 그 원두의 사용 시작점에 가깝습니다. 특히 약배전 원두는 첫 주보다 둘째 주에 잔이 차분해지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집에서는 원두 봉투에 개봉 날짜보다 로스팅 날짜를 먼저 적어 두면 좋습니다. 같은 원두를 드립으로는 로스팅 후 닷새째 즐기고, 에스프레소로는 열흘째부터 즐길 수도 있습니다. 기다리는 날짜는 취향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제와 오늘의 맛이 왜 달랐는지 설명해 주는, 꽤 쓸모 있는 단서가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