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오래된 흑백영화를 틀었다가 배우의 표정보다 먼저 배경음악에 귀가 갔습니다. 화면 속 인물은 말하지 않는데도 장면은 꽤 시끄럽고, 이야기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더군요. 무성영화 시기를 처음 접한다면 이 경험이 의외일 수 있습니다. ‘무성’이라는 이름 때문에 소리 없는 영화를 떠올리기 쉽지만, 당시 관객이 만난 영화는 지금 우리가 조용한 방에서 재생하는 영상과 달랐습니다.
무성영화 시기는 언제까지였을까요?
대체로 영화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189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말까지를 무성영화 시기로 봅니다. 다만 끝나는 해를 딱 하나로 자르기는 어렵습니다. 영국영화협회는 1895년부터 1929년까지의 작품을 무성영화 소장 범위로 소개하고, 미국 의회도서관은 미국 무성 장편영화의 시기를 1912년부터 1929년까지로 다룹니다. 초기의 짧은 영상과 나중에 등장한 장편영화가 서로 다른 속도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1890년대의 영화에는 1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장면도 많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장면을 이어 이야기를 만들고, 1910년대에는 장편영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죠. 그래서 무성영화라고 해도 모두 같은 모습은 아닙니다. 초기 작품의 단순한 촬영 방식과 1920년대 후반 작품의 복잡한 세트·편집을 나란히 보면 약 30년 사이 영화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무성’인데 극장에서는 무엇이 들렸을까요?
필름에 배우의 목소리를 안정적으로 맞춰 넣기 어려웠다는 뜻에서 ‘무성’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극장 안까지 늘 고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피아노 연주자나 오르간 연주자, 때로는 악단이 화면에 맞춰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보존한 당시 악보 자료를 보면 장면별로 사용할 곡을 제안하는 안내문과 반주용 악보도 있었습니다. 같은 영화라도 어느 극장에서 어떤 반주를 들었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었던 셈입니다.
화면 사이에 끼워 넣은 글자 화면은 대사나 상황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글자만 읽고 따라가는 영화라고 생각하면 조금 아쉽습니다. 배우가 문 쪽을 돌아보는 타이밍, 갑자기 가까워지는 얼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편집 자체가 정보를 건넵니다. 요즘 영화에서 대사 한 줄이 맡을 일을 표정과 화면 구성에 나눠 맡긴다고 생각하면 보기 편합니다.
1927년에 갑자기 모든 영화가 말하기 시작했을까요?
1927년 개봉한 <재즈 싱어>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이야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노래와 일부 대사가 화면에 맞춰 녹음된 장편영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화 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로 채워진 작품은 아닙니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작품 해설도 영화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무성영화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설명합니다.
기술이 등장했다고 모든 극장이 곧바로 음향 설비를 갖출 수도 없었습니다. 1927년은 변화의 출발점에 가까우며, 1920년대 말까지 무성영화와 유성영화가 함께 만들어지고 상영됐습니다. 이 과도기를 알고 보면 ‘최초의 유성영화가 나오자 무성영화가 사라졌다’는 식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간단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기술뿐 아니라 극장 설비, 제작 방식, 관객의 기대도 함께 바뀌어야 했으니까요.
처음 볼 작품은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됩니다
몸을 쓰는 코미디가 좋다면 버스터 키턴의 <제너럴>(1926)이 좋은 출발점입니다. 기차를 따라 움직이는 액션과 상황의 변화만으로도 이야기를 쫓아갈 수 있습니다. 거대한 도시 풍경과 초기 공상과학영화가 궁금하다면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가 어울립니다. 두 작품은 모두 무성영화이지만 웃음을 만드는 방식과 화면의 규모가 크게 다릅니다.
배우의 얼굴이 이야기를 얼마나 끌고 갈 수 있는지 보고 싶다면 <잔 다르크의 수난>(1928)도 있습니다. 인물의 얼굴을 가까이 붙잡는 화면이 강렬한 작품입니다. 처음부터 긴 영화가 부담스럽다면 짧은 코미디부터 보는 편이 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래된 영화는 복원본이나 상영본에 따라 화면 상태와 반주가 다를 수 있으니, 감상 전에는 어떤 판본인지 한 번 확인하는 게 좋습니다.
지금 볼 수 있는 작품만으로 당시 영화 전체를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미국 의회도서관 조사에 따르면 1912년부터 1929년 사이 제작된 미국 무성 장편영화의 약 70%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남은 필름을 복원하고 다시 상영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무성영화를 볼 때는 낯선 연기 방식에 익숙해지려 애쓰기보다, 말이 없는 장면에서 내 눈이 어디로 먼저 가는지 지켜보게 됩니다. 그 순간 오래된 영화가 의외로 가까워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