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에 새긴 당진 50년

화폭에 새긴 당진 50년

“다시 살아도 화가로 살겠다.” 이경숙 화백이 걸어온 50년의 예술 인생이 한 권의 책과 북토크를 통해 지역사회에 공개됐다.

당진문화재단이 발간한 『당진문화예술인 구술총서 06 이경숙 화백』 출판기념 북토크가 2026년 10월 31일 열렸다. 행사는 스물네 살에 당진 합덕으로 내려온 뒤 미술교사와 화가, 미술치료사로 살아온 이 화백의 생애를 돌아보는 자리였다.

현장에서는 어린 시절과 교직 생활, 제자들과의 인연, 지역 미술인들의 모임인 학동인회, 작품 활동과 여행, 가족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한 예술가의 기억을 따라가며 당진 미술계가 성장해 온 과정도 함께 살펴봤다.

합덕에서 시작한 교직과 작품 활동

이경숙 화백은 1975년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을 떠나 당진 합덕에 정착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생활했던 기억을 지닌 그는 합덕을 찾았다가 넓은 들판과 합덕성당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높은 산자락을 바라보며 자란 그에게 지평선까지 펼쳐진 합덕의 들판은 낯설면서도 매력적인 풍경이었다.

당시에는 기차를 타고 신례원에서 내린 다음 완행버스로 학교까지 이동했다. 길은 포장되지 않아 차량이 지나가면 흙먼지가 일었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흙탕물이 튀었다. 그러나 이 화백의 기억에는 불편한 교통 여건보다 길가에 피어 있던 칸나와 코스모스, 해바라기의 모습이 더 또렷하게 남았다.

그는 서야중학교와 서야고등학교에서 첫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교실에서는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쳤고, 학교 밖에서는 자신의 작품을 꾸준히 그렸다. 주말에는 인주중학교에서 근무하던 성정숙 교사와 소품을 제작하고 서울 인사동 전시장을 찾아 여러 작품을 살펴보기도 했다.

교실에서 만난 학생들은 이 화백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당시 어린 학생들은 시간이 흐른 뒤 교사와 작가, 교수와 성직자 등 각자의 길을 걸었다. 수십 년이 지나 스승을 다시 찾아온 제자도 있었다. 젊은 교사와 어린 학생으로 만났던 이들이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마주하는 장면에는 오랜 교육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겼다.

작품에 남겨진 기억과 기록

구술총서 제작 과정에서는 이 화백의 생애뿐 아니라 작품에 얽힌 구체적인 기억도 정리됐다. 이 화백은 작품마다 어느 곳에서 만난 풍경인지,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는지를 직접 손으로 적었다.

작품 한 점에 붙은 설명은 단순한 제작 정보에 그치지 않았다. 그림이 탄생한 장소와 당시의 감정, 화가가 바라본 풍경의 의미를 함께 보여주는 기록이 됐다. 이 같은 자료는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실마리이자 한 예술가의 시간을 보존하는 바탕으로 책에 담겼다.

처음에는 한 화가의 생애를 기록하는 작업으로 출발했지만, 구술이 이어질수록 제자와 동료, 지역 미술인들의 이름이 거듭 등장했다. 한 사람의 기억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당진 미술이 걸어온 시간도 함께 드러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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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동인회가 연 지역 미술의 길

이경숙 화백이 당진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할 당시 지역의 미술 환경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이 화백은 그 시절을 전시회 개최를 꿈꾸기 어려운 불모지로 기억했다. 작품을 걸 수 있는 전시장이 부족했고, 지역 미술인들이 정기적으로 활동할 단체도 마땅하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젊은 미술교사들은 자신들끼리 전시회를 열어보자는 뜻을 모았다. 그 결실이 1982년 열린 학동인회 창립전이었다.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던 교사들이 각자의 작품을 준비해 전시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한 차례 전시를 열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지만, 참여자들은 ‘학동인’이라는 이름 아래 다음 전시를 준비하며 모임을 이어갔다. 전시 공간을 확보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빌릴 수 있는 장소가 생기면 회원들이 직접 공간을 청소하고 작품을 옮겨 벽에 걸었다.

한정된 여건에서도 전시가 거듭되면서 지역 미술 활동의 토대가 넓어졌다. 이후 1996년에는 당진에 미술협회가 만들어졌다. 이 화백은 학동인회 활동이 당진 미술 발전을 이룬 발판 가운데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오늘날에는 전시장을 찾아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자연스럽지만, 당시 젊은 미술교사들에게는 작품을 걸 공간을 마련하는 것부터 중요한 과제였다. “우리끼리 전시회를 해보자”는 작은 제안이 지속적인 활동으로 이어지며 당진 미술의 한 흐름을 형성했다.

자연에서 발견한 사람의 삶

이경숙 화백이 오랫동안 그려온 중심 소재는 자연이다. 산과 들판, 바다와 포구, 오래된 배와 덕장, 나무와 구름이 그의 화폭에 담겼다. 여행지에서는 현장을 먼저 살피고 스케치하며 색을 연구했다. 큰 작품은 작업실로 가져와 오랜 시간 다듬었다.

울진 후포항의 덕장도 현장에서 만난 풍경 가운데 하나다. 처음에는 생선이 걸린 덕장과 항구의 모습에 시선이 머물렀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동과 일상도 함께 바라보게 됐다. 화면에 인물이 직접 나타나지 않더라도 배와 밧줄, 그물과 덕장에는 누군가의 손길과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 화백은 자연을 자신의 스승이자 일부이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존재로 설명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풍경화는 화려한 기교만을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다.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이 잠시 그곳에 머물거나 쉬고 싶다는 마음을 느끼게 하는 그림을 지향했다.

오랜 작품 활동을 통해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과 겸재정선공모미술대전 특선 등의 성과를 거뒀다. 2019년에는 ‘당진 이 시대의 작가’로 선정됐다. 그러나 이 화백이 오래 마음에 품어온 목표는 수상 경력을 쌓는 일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좋은 그림 한 점을 남기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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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을 이어간 미술치료 활동

교직을 떠난 뒤에도 이 화백의 배움은 멈추지 않았다. 봉사활동 중 미술치료를 권유받은 것을 계기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2년 동안 미술치료 과정을 이수해 자격을 갖춘 뒤 남부노인복지관을 비롯한 현장에서 청소년과 중년층 등을 대상으로 미술치료 활동을 이어갔다.

학생을 가르친 교직 경험과 오랜 작품 활동은 미술치료라는 새로운 역할로 확장됐다. 그림은 개인의 창작을 위한 수단에 머물지 않고 여러 세대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매개가 됐다.

신앙 역시 이 화백의 삶과 오랜 시간 함께했다. 남편과 성가대에서 노래했으며 전국의 성지를 순례했다. 가까운 솔뫼와 합덕, 신리와 여사울을 비롯해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를 따라 마카오와 상하이도 찾았다.

이제 고향이 된 당진 합덕

서울을 떠나 합덕에 정착했던 스물네 살의 미술학도는 당진에서 가족을 이루고 학생을 가르쳤으며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이 화백은 이제 누군가 고향을 묻는다면 “당진 합덕”이라고 답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가족과 함께 살고 학생을 가르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온 곳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자신을 다시 만난다면 무슨 말을 건네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는 “그래, 그래. 너의 젊음을 사랑한다”고 답했다. 낯선 지역에서 교직을 시작하고 가정을 꾸리며 자녀를 키우는 가운데서도 작품 활동을 놓지 않았던 젊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말이었다.

다시 살아도 화가의 길을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의 의미를 묻는 말에는 자신의 존재이자 자식과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미술학도에서 미술교사로, 아내와 어머니로, 제자들의 스승과 미술치료사로 역할은 넓어졌지만 그림은 그의 삶에서 변함없는 중심으로 남았다.

한 예술가를 넘어 지역의 기록으로

2026년 10월 31일 열린 북토크는 새로 발간된 책을 소개하는 행사인 동시에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지역의 시간을 되짚는 자리였다. 전시장조차 마련하기 어려웠던 시절부터 오늘날의 당진 미술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과정에는 이경숙 화백과 함께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이어온 사람들의 시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행사장에서는 이 화백이 마이크를 들고 자신의 예술 인생을 설명했고, 남편과 가족도 출판을 기념하는 자리를 함께했다. 참석자들은 교직과 창작, 지역 미술 활동, 미술치료로 이어진 생애의 여러 장면에 귀를 기울였다. 북토크가 끝난 뒤에는 가족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당진문화예술인 구술총서 06 이경숙 화백』은 한 화가의 생애를 정리한 책이면서 당진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그리고, 전시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온 시간을 담은 기록이다.

개인의 기억을 체계적으로 남기는 작업이 지역 문화예술의 역사를 보존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이번 출간과 북토크를 통해 확인됐다. 이경숙 화백의 50년 예술 인생은 한 사람의 작품 세계를 넘어 당진 미술이 성장해 온 과정과 그 안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함께 보여줬다.

화폭에 새긴 당진 50년
화폭에 새긴 당진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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