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나는 공간과 맛이 있다. 오래된 양곡 창고의 기억을 품은 임실창고1964와 전통 장류의 깊은 맛을 이어가는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이 그 주인공이다. 두 장소는 낡고 묵은 것에 새로운 쓰임과 의미를 더하며 전북 지역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양곡 창고에서 베이커리 카페로
임실읍 성가리는 한국 최초의 치즈 공장이 자리한 곳이다. 이곳에는 쓰임을 다한 양곡 창고를 고쳐 만든 임실창고1964가 있다. 공간의 이름에는 임실치즈를 처음 만든 지정환 신부가 임실에 첫발을 내디딘 해인 1964년이 담겼다.
오랫동안 곡식을 품었던 창고는 농촌 재생 사업을 거치며 새로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2019년 전북형 햇살가득 농촌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기존 건물에 창과 문을 내고 내부를 정비했으며, 2023년에는 빵과 음료를 선보이는 베이커리 카페로 문을 열었다.
과거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새로운 역할을 더했다는 점이 임실창고1964의 특징이다. 곡식을 보관하던 장소가 사람들에게 휴식과 이야기를 건네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치즈 도시의 특징을 담은 메뉴
임실창고1964는 임실이 치즈의 도시라는 사실을 메뉴를 통해 드러낸다. 치즈를 보관하기 위해 만들었던 토굴에서 착안한 토굴빵을 굽고, 크림치즈커피와 고다치즈커피 등 치즈를 활용한 음료도 선보인다.
토굴빵과 치즈 음료는 장소의 역사와 지역의 대표 식재료를 한자리에서 연결한다. 오래된 양곡 창고라는 건물의 배경과 임실치즈의 이야기가 메뉴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옛 창고의 결을 살린 공간
실내에는 양곡 창고 특유의 예스러운 분위기가 남아 있다. 천장은 오래된 건물의 인상을 전하고, 회색빛 내벽과 나무 탁자는 서로 다른 질감을 이루며 차분한 분위기를 만든다. 회색 벽의 서늘한 느낌과 목재 가구의 따뜻한 빛깔이 한 공간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정원으로 나가면 넓게 펼쳐진 초록빛 잔디가 시야에 들어온다. 곳곳의 그늘막 텐트 아래에서는 방문객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가족 단위 방문객들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과 잔디밭이 어우러진 정원에는 한가롭고 평온한 풍경이 이어진다.
전통 장류의 시간을 지키는 마을
임실의 오래된 창고가 공간의 시간을 보여준다면,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은 장이 익어가는 시간을 전한다. 마을 안에는 겹겹의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이 이어지고, 각 마당에는 집채만 한 장독들이 자리한다.
정갈한 한옥과 장독이 어우러진 골목은 고즈넉하고 정겨운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은 전통 장류 산업을 활성화하고 순창고추장의 명성과 제조 비법을 지키기 위해 1997년 조성됐다. 순창의 전통 장류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공간인 동시에 그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마을이다.
장독마다 채워진 순창의 맛
마을 곳곳에는 장류를 판매하는 업체들이 자리하고 있다. 대표적인 고추장을 비롯해 된장과 청국장을 만날 수 있으며, 마늘과 깻잎, 매실, 무 등 여러 재료로 만든 장아찌도 함께 선보인다.
장독에는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장류가 차곡차곡 담겨 있다. 고추장과 된장, 청국장부터 다양한 장아찌까지 밥과 곁들이기 좋은 먹거리가 한자리에 모여 순창 장류 문화의 폭넓은 모습을 전한다.
골목에서 만나는 장류 문화
마을을 천천히 걷다 보면 크기와 모양이 서로 다른 항아리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항아리마다 생김새가 달라 골목길을 따라 놓인 작품처럼 보인다. 전통 장류가 익어가는 장독과 한옥의 기와지붕이 어우러지면서 순창만의 독특한 경관을 만든다.
입구 주변에는 청사초롱 대신 메주를 걸어 놓은 듯한 산책로가 이어진다. 가까이에는 초록빛 생명이 자리한 연못과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정자도 있다. 방문객들은 마을의 골목과 산책로를 거닐며 장류 문화가 생활 공간에 스며든 풍경을 살펴볼 수 있다.
순창장류박물관에서 잇는 역사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 가까이에는 순창장류박물관이 자리한다. 이곳에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장 담그기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다. 마을의 한옥과 장독을 둘러본 뒤 박물관을 함께 살펴보면 전통 장류가 이어져 온 흐름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임실창고1964와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오래된 시간의 가치를 보여준다. 임실에서는 역할을 다한 양곡 창고가 지역의 치즈 문화를 담은 공간으로 다시 문을 열었고, 순창에서는 한옥과 장독, 장류 업체와 박물관이 전통 장 담그기의 역사와 맛을 이어가고 있다. 창고에 쌓인 시간과 장독 안에서 익어가는 시간이 전북의 깊은 이야기를 완성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