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시가를 읽다가 ‘하마’에서 멈칫하는 학생이 종종 있습니다. 물속에서 입을 크게 벌리는 동물을 떠올렸는데, 앞뒤 문장이 도무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글자 두 개는 같아도 뜻을 가르는 열쇠는 문장 속에 있습니다.
고전 속 하마는 ‘벌써’라는 뜻입니다
허난설헌의 「규원가」는 ‘엊그제 젊었더니 하마 어이 다 늙거니’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하마를 ‘벌써’로 바꾸면 뜻이 금세 풀립니다. 엊그제 젊었던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늙었느냐는 탄식이지요. ‘엊그제’와 ‘다 늙거니’ 사이에 놓인 하마가 시간의 빠른 흐름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옛말 ‘하마’는 ‘이미’, ‘벌써’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고전에서 낯선 낱말을 만났을 때 뜻풀이만 외우면 다른 작품에서 또 막히기 쉽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젊음이 어느새 지나갔다는 화자의 마음까지 읽어야 ‘벌써’라는 풀이가 자연스럽게 남습니다.
옛 문헌에는 ‘ᄒᆞ마’와 같은 표기도 보입니다. 지금의 ‘하마’와 소리와 뜻을 이어서 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다만 옛말의 쓰임이 오늘날과 완전히 같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나 ‘벌써’로 읽히는 자리도 있고, ‘이제 곧’처럼 앞으로 닥칠 일을 가리키는 자리도 있습니다. 어느 뜻인지는 앞뒤의 시제와 상황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동물 하마는 왜 순우리말이 아닐까요?
동물 이름 ‘하마’는 한자로 河馬라고 씁니다. 河는 강, 馬는 말이니 글자 그대로는 ‘강의 말’입니다. 물가에 사는 큰 동물을 보고 붙인 이름이지요. 말과 생김새나 생물학적 분류가 같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여기서 구별할 점이 있습니다. 고전에서 ‘벌써’를 뜻하는 하마는 고유어로 볼 수 있지만, 동물 이름 하마는 한자어입니다. 한글로 똑같이 적힌다고 해서 두 말의 뿌리까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말에서 ‘순우리말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먼저 어느 뜻의 단어를 묻는지 확인합니다. 사전에서 같은 표기 아래 뜻을 나누거나 동음이의어를 따로 세우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마가 물에 들어갔다’의 하마 앞에는 동물을 가리키는 말이 놓입니다. 반면 ‘하마 어이 다 늙거니’의 하마는 뒤의 서술을 꾸미며 시간을 나타냅니다. 하나는 명사, 다른 하나는 부사입니다. 문장 안에서 맡은 역할까지 보면 한자어와 고유어를 혼동할 일이 줄어듭니다.
‘하마터면’도 같은 하마에서 왔을까요?
‘하마터면 버스를 놓칠 뻔했다’처럼 쓰는 말도 떠오릅니다. 여기서 하마만 떼어 고전의 ‘벌써’와 곧바로 연결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낱말의 일부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어원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국립국어원 온라인 가나다도 ‘하마터면’의 어휘 역사 정보가 따로 없어 그 어원을 명확히 답하기 어렵다고 안내했습니다.
현대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뜻과 표기는 분명합니다. ‘하마터면’은 조금만 잘못했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상황을 가리키는 부사입니다. 그래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처럼 실제로는 피한 일을 말할 때 자연스럽습니다. ‘하마터면 넘어졌다’보다 ‘넘어질 뻔했다’를 이어 쓰면 아슬아슬했던 상황이 또렷해집니다.
표기는 ‘하마터면’입니다. ‘하마트면’처럼 적는 경우가 있지만, 한글 맞춤법 제40항의 붙임 3은 ‘하마터면’을 소리대로 적는 부사의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규정은 현재의 표기를 확인하는 근거입니다. ‘하마터면’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어떤 말에서 줄었는지까지 증명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표기와 어원은 서로 다른 질문이니까요.
두 글자보다 문장 전체를 읽어야 합니다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세 문장을 나란히 보여 주면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하마가 헤엄친다’에서는 동물이 움직입니다. ‘하마 날이 저물었다’처럼 옛 글의 문맥에 놓이면 ‘벌써’로 읽을 여지가 생깁니다. ‘하마터면 늦을 뻔했다’에서는 낱말 전체가 아슬아슬한 상황을 나타냅니다. 가운데 문장은 현대 일상 대화에 그대로 옮겨 쓰기보다 옛말의 뜻을 익히기 위한 보기로 받아들이면 좋습니다.
이름이 같다는 사실보다 문장 안에서 무엇을 하는 말인지가 더 많은 것을 알려 줍니다. 「규원가」의 하마를 만날 때마다 저는 학생들에게 먼저 ‘엊그제’와 ‘다 늙거니’를 읽게 합니다. 그러면 사전의 ‘벌써’라는 풀이가 외워야 할 답이 아니라, 그 문장에 꼭 들어맞는 말로 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