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여행 사진을 넘겨보다가, 오래 기억에 남은 장면은 유명한 전망대보다 골목 끝에 놓인 작은 의자였다는 걸 깨달았다. 11월에는 그런 장면을 만나기 좋다. 걷다 보면 조금 서늘하지만, 한낮에는 볕을 따라 천천히 움직일 수 있다. 11월 여행지 국내 어디가 좋을지 묻는다면 나는 공주 제민천, 목포 서산동, 순천 와온마을을 떠올린다. 셋 다 특별한 일정 없이 걷는 시간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공주 제민천에서는 목적지보다 건너편 골목이 좋았다
공주에 갔을 때는 제민천을 먼저 찾았다. 물길 양옆으로 낮은 건물과 오래된 주택가가 이어져서, 큰길을 걷다가도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면 분위기가 바뀐다. 독립 책방과 카페가 눈에 들어오지만, 내가 오래 머문 곳은 가게 안보다 물가의 벤치였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속도가 느려 보였고, 나도 그 속도에 맞춰 걸었다.
처음부터 골목을 샅샅이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 지도에서 제민천을 찾고 물길을 따라 걷다가 마음에 드는 다리에서 건너가면 된다. 골목 안쪽에는 주민들이 사는 집이 있으니 창문 앞에서 사진을 오래 찍거나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건 피하는 편이 좋다. 물가만 걷는다면 비교적 평탄하지만, 발길 닿는 대로 골목을 오가다 보면 걷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진다. 나는 약 한 시간쯤 잡고 중간에 앉아 쉬었다.
제민천 주변은 알려진 산책길이라 주말 한낮에는 사람이 모일 수 있다. 조용히 걷고 싶다면 평일 오전이 더 어울린다. 11월에는 해가 건물 뒤로 넘어가면 금방 쌀쌀해져서 얇은 겉옷 하나보다 바람을 막아 주는 옷이 편했다.
목포 서산동에서는 바다가 골목 사이로 조금씩 보였다
목포 서산동 시화골목은 이름만 듣고 평평한 벽화길을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유달산 자락을 따라 올라가는 생활 골목에 가깝다. 골목 입구에서 보리마당 쪽으로 천천히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집 지붕 사이로 바다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전망이 한 번에 펼쳐지는 곳보다 그 짧은 틈이 더 기억에 남았다.
골목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나는 한쪽 길로 올라가 보리마당에서 잠시 쉬고, 다른 길로 내려왔다. 길을 잃을 만큼 넓은 동네는 아니지만 계단과 경사가 꽤 있어 운동화가 편하다. 비가 온 뒤라면 발밑을 더 살피는 게 좋겠다. 한국관광공사 여행 안내에도 이곳은 주민의 시와 그림을 만나는 골목으로 소개된다. 실제로 걸어보면 작품을 보는 시간과 누군가의 집 앞을 지나가는 시간이 맞닿아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사진보다 걸음의 크기가 중요하게 느껴졌다. 대문이 열려 있거나 빨래가 널린 집 앞에서는 카메라를 내리고 지나갔다. 관광지가 되었다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매일 오르내리는 귀갓길이다. 11월의 목포는 볕이 있는 골목과 그늘진 계단의 체감이 달라, 올라갈 때 입었던 겉옷을 내려올 때 다시 여미게 됐다.
순천 와온마을에서는 해가 지기 전부터 기다렸다
순천에서는 와온마을 바닷가에 해가 지기 전에 도착했다. 노을 명소라는 말을 듣고 가면 붉은 하늘부터 기대하기 쉬운데, 내게 좋았던 건 그 전의 풍경이었다. 물이 빠진 갯벌의 색이 천천히 달라지고, 멀리 보이는 땅의 윤곽이 조금씩 흐려졌다. 바다 앞에서 오래 서 있어도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길을 찾을 때는 와온관광문화관을 기준으로 삼으면 편하다. 그 부근에서 해안을 따라 걸으며 전망이 트인 곳을 고르면 된다. 다만 마을 안쪽 골목까지 무작정 들어가기보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을 따르는 편이 마음이 놓였다. 바닷바람이 직접 닿는 곳이라 같은 11월이라도 공주 골목보다 훨씬 춥게 느껴졌다. 해넘이만 보고 바로 떠날 계획이어도 목을 감쌀 옷은 챙기는 게 좋다.
노을은 날씨에 따라 전혀 다르다. 흐린 날에는 붉은빛을 못 볼 수도 있다. 그래도 와온마을에서는 하늘보다 갯벌과 마을의 저녁을 함께 보는 시간이 좋았다. 해가 지고 나면 길이 빠르게 어두워지니, 처음 서 있던 곳으로 돌아갈 시간을 조금 남겨 두었다.
세 곳을 걸으며 달라진 여행 계획
세 동네를 하루에 묶어 다니기보다는 한 번의 여행에 한 곳씩 넣는 편이 자연스럽다. 제민천은 물길과 골목을 오가며 반나절을, 서산동은 오르막을 쉬어 가며 한두 시간을, 와온마을은 해 지기 전후의 시간을 넉넉히 비워 두면 좋았다. 11월에는 낮이 짧아 이동을 많이 넣을수록 정작 동네를 볼 시간이 줄어든다.
나는 이제 낯선 동네에 도착하면 먼저 유명한 장소를 표시하기보다 앉을 곳과 돌아갈 길을 살핀다. 그러고 나면 길가의 화분이나 문을 닫는 가게, 저녁 준비 냄새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조용한 여행은 사람이 전혀 없는 곳을 찾는 일이 아니라, 그곳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으며 잠시 같은 속도로 걷는 일에 가까운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