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오래된 드라마 주제곡을 몇 곡 이어 들었는데, 제목보다 먼저 장면이 떠올랐다. 누군가 달려오던 거리, 경기장에 울리던 함성,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던 얼굴까지. 90년대 드라마 ost는 노래만 따로 들어도 좋지만, 그 장면을 알고 들으면 감정의 온도가 달라진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방영된 드라마 세 편을 골랐다. 다시 볼 작품을 찾는 사람이라면 노래의 분위기부터 취향을 가늠할 수 있다. 아래 내용은 주요 사건이나 마지막 전개를 밝히지 않는다.
가볍게 설레고 싶다면 질투
1992년 MBC 드라마 <질투>의 주제곡은 유승범이 부른 ‘질투’다.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리듬이 앞서 나간다. 망설이며 속마음을 재는 인물들보다, 이미 마음은 한 걸음 먼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다. 밝고 경쾌한 멜로디인데도 제목처럼 살짝 복잡한 감정이 남는다. 그래서 이 곡은 단순히 신나는 옛 노래로만 들리지 않는다.
드라마도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따라간다. 요즘 로맨스의 빠른 고백이나 강한 사건에 익숙하다면 인물들이 서로를 의식하는 시간이 길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이 재미다. 말 한마디의 뉘앙스가 달라지고, 평범한 만남이 어색해지는 순간을 지켜보게 된다. 큰 갈등보다 두 사람의 대화와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잘 맞는다.
처음부터 전편을 달릴 필요는 없다. 주제곡을 먼저 듣고 초반 몇 회를 보면 드라마가 보여주는 사랑의 속도를 금방 알 수 있다. 반대로 촘촘한 사건 전개를 기대한다면 그 속도가 답답할 수도 있다. 내게 <질투>는 이야기를 빨리 끝내기보다,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한 며칠을 오래 기억하게 하는 작품이다.
기운이 필요한 날에는 마지막 승부
1994년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에는 김민교가 부른 동명의 주제곡이 있다. 노래를 들으면 농구 경기를 몰라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힘 있게 뻗는 보컬과 밀고 나가는 박자가 코트의 속도에 잘 붙는다. <질투>가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려준다면, 이 곡은 지금 뛰어야 할 이유를 바깥으로 꺼낸다.
드라마를 볼 때는 승패만 좇기보다 선수들 사이의 경쟁과 우정에 눈을 두는 편이 좋다. 한 번의 경기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이야기보다, 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밀고 당기는 과정이 오래 남는다. 운동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도 팀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청춘극에 끌린다면 볼 만하다.
다만 90년대 스포츠 드라마 특유의 뜨거운 대사와 감정 표현은 지금의 절제된 연출과 거리가 있다. 그 열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날에 보는 게 좋다. 나는 의욕이 떨어질 때 이 노래를 다시 듣는다. 드라마의 세부 장면을 잊어도, 무언가를 끝까지 해내고 싶던 인물들의 기세는 금세 돌아온다.
짙은 멜로가 당긴다면 별은 내 가슴에
1997년 MBC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와 함께 떠오르는 곡은 안재욱의 ‘Forever’다. 앞의 두 곡이 걸음을 재촉한다면, 이 노래는 한 장면 앞에 오래 서 있게 한다. 안재욱의 목소리는 감정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노래가 흐를 때 인물의 마음도 분명해진다. 멜로의 큰 감정선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그 솔직함이 장점이다.
이 작품은 음악과 인물의 인기가 함께 기억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처음 본다면 당시의 스타성을 알아야만 재미있는 건 아니다. 인물이 사랑과 꿈 사이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노래가 그 표정에 얼마나 깊이를 더하는지에 집중하면 된다. 반면 현실적인 관계 묘사나 담백한 대사를 선호한다면 감정의 크기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Forever’만 반복해서 듣다가 드라마를 틀면 예상보다 진한 90년대 멜로를 만나게 된다. 그 차이를 알고 시작하면 좋다. 노래 한 곡의 낭만을 찾는 날과, 그 낭만을 만든 이야기에 시간을 쓰고 싶은 날은 다르니까.
오늘의 기분으로 한 편을 고른다면
세 작품의 방영 시기는 5년 남짓 차이지만, 노래가 데려가는 곳은 꽤 다르다. 산뜻한 대화와 설렘이 필요하면 <질투>, 다시 움직일 기운이 필요하면 <마지막 승부>, 감정에 오래 머물고 싶으면 <별은 내 가슴에>가 맞는다. 어느 작품이 더 뛰어난지 순서를 매기기보다 지금 내 마음이 어느 곡에 반응하는지 듣는 편이 선택하기 쉽다.
오래된 드라마는 화면 비율이나 대사의 리듬 때문에 첫 회가 낯설 수 있다. 그래도 좋아하는 노래가 등장하는 순간, 조금 전까지 멀게 느껴지던 인물이 가까워진다. 90년대 드라마 ost를 다시 듣는 즐거움은 추억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미처 보지 않았던 이야기 한 편을 지금의 취향으로 새로 만날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