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오래된 드라마 음악을 이어 듣다가, 노래 제목보다 화면 속 표정이 먼저 떠올랐다. 드라마를 1000편 넘게 봤지만 이런 경험은 유독 2000년대 작품에서 잦다. 그 시절 OST는 인물의 감정을 크게 밀어 올리기도 했고, 아무 일 없는 오후의 공기까지 남겨 두기도 했다. 같은 시대의 노래라도 어떤 기분으로 다시 보고 싶은지에 따라 골라 들으면 꽤 다른 시간이 된다. 아래에는 이야기의 중요한 반전이나 마지막 장면을 밝히지 않았다.
마음껏 슬픈 드라마가 필요한 날
2004년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떠올리면 박효신의 ‘눈의 꽃’을 빼기 어렵다. 이 곡은 일본 가수 나카시마 미카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이다. 원곡을 아는 사람도 박효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드라마의 차가운 풍경을 별도로 기억할 만큼 두 버전의 인상이 다르다. 첫 소절부터 감정을 세게 건드리지만, 노래만 듣고 작품 전체가 눈물만 요구할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인물들이 가까워지는 순간의 따뜻함이 있어서 뒤따르는 아픔도 오래 남는다.
멜로의 감정에 깊이 잠기고 싶은 사람에게 맞는다. 반대로 지친 하루 끝에 마음이 가벼워질 작품을 찾는다면 이 드라마는 다른 날로 미루는 편이 좋겠다. ‘눈의 꽃’은 분위기를 시험해 볼 좋은 첫 곡이다. 노래 한 곡에도 마음이 묵직해진다면 본편 역시 비슷한 결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가벼운 웃음 뒤에 남는 노래
2005년 <쾌걸춘향>의 izi ‘응급실’은 제목만 보면 심각한 노래 같다. 그런데 드라마는 빠른 호흡의 로맨틱 코미디로 시작한다. 밝게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을 따라가다 이 노래를 만나면, 장난처럼 보였던 감정이 사실은 꽤 절실했다는 걸 느끼게 된다. 노래와 화면의 온도 차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같은 해 방영한 <내 이름은 김삼순>에는 클래지콰이의 ‘She Is’가 있다. ‘응급실’이 후회를 크게 외친다면, ‘She Is’는 좋아하는 마음을 조금 더 가볍고 세련된 리듬에 싣는다. 삼순의 솔직한 말투와 이 노래의 경쾌함이 만날 때 드라마의 매력이 잘 드러난다.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옛 로맨스를 원한다면 두 작품 모두 후보가 된다. 다만 <쾌걸춘향>은 감정의 굴곡이 더 크고, <내 이름은 김삼순>은 어른의 연애와 자존감을 다루는 대화가 더 오래 남는다.
배경음악까지 좋아지는 커피프린스
2007년 <커피프린스 1호점>의 티어라이너 ‘바다여행’은 앞의 곡들과 쓰임새가 다르다. 누군가의 마음을 대신 설명하기보다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에 공기를 채운다. 티어라이너의 밴드 버전과 극 중 한성을 연기한 이선균의 버전이 있어 비교해서 듣는 재미도 있다. 같은 멜로디인데 하나는 드라마 밖에서도 편하게 틀어 둘 수 있는 노래 같고, 다른 하나는 인물의 생활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처럼 들린다.
이 작품은 주인공들의 관계만 따라가도 재미있지만, 음악을 좋아한다면 카페의 소음과 걸음걸이, 대화 사이에 곡이 어떻게 스며드는지도 눈여겨볼 만하다. 대단한 사건보다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이 조금씩 달라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권한다. 오래된 드라마의 화면 질감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는 있어도, 음악이 그 시절의 여름을 꽤 생생하게 데려온다.
화려한 장면을 원한다면 2009년으로
2009년 <꽃보다 남자>의 티맥스 ‘파라다이스’는 드라마가 시작된다는 신호처럼 들린다. 앞서 고른 곡들이 인물의 속마음이나 공간의 분위기를 붙잡는다면, 이 노래는 작품의 크고 반짝이는 세계를 한꺼번에 연다. 현실적인 대화와 잔잔한 전개를 기대하고 보면 과장된 설정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대신 만화 같은 로맨스의 속도와 화려함을 즐길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음악까지 포함해 그 매력을 받아들이기 쉽다.
2000년대 드라마 ost를 다시 들을 때 나는 인기 순서보다 그날 원하는 감정부터 고른다. 울고 싶으면 ‘눈의 꽃’, 웃다가 마음이 움직이는 이야기를 원하면 ‘응급실’이나 ‘She Is’, 편안한 여름의 공기를 느끼고 싶으면 ‘바다여행’이다. 노래가 마음에 남았다면 그때 본편을 찾아도 늦지 않다. 어느 작품이 지금의 나와 맞을지, 첫 장면보다 먼저 알려 주는 건 때로 음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