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손님이 케멕스로 내린 커피가 집에서는 유난히 밍밍하다고 했습니다. 원두도 필터도 같았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매장에서 쓰는 것보다 훨씬 굵게 갈고 있더군요. 케멕스는 맑고 부드러운 맛이 매력적인 기구입니다. 그만큼 분쇄가 조금만 달라져도 단맛이 옅어지거나 끝맛이 거칠어지는 차이가 잘 드러납니다.
케멕스에는 중간보다 조금 굵은 분쇄부터
케멕스 공식 안내는 중간보다 굵은 분쇄를 권합니다. 처음에는 굵은 소금 알갱이 정도를 떠올리면 됩니다. 다만 소금과 원두는 모양이 달라 눈대중만으로 정확히 맞추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매장에서 기준으로 삼는 건 알갱이의 이름보다 물이 빠지는 속도와 컵에 남는 맛입니다.
케멕스 필터는 종이가 두껍고, 접힌 세 겹 부분을 주둥이 쪽에 놓습니다. 이 부분을 반대로 놓아 주둥이의 공기 통로가 막히면 분쇄가 적당해도 물이 느리게 내려갈 수 있습니다. 추출이 길어졌다고 무조건 더 굵게 갈기 전에 필터 위치부터 확인하는 이유입니다.
분쇄가 지나치게 굵으면 물이 빨리 지나가면서 산미만 도드라지고 단맛이 비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너무 가늘면 가루가 필터의 흐름을 늦추고, 오래 닿은 물이 떫거나 텁텁한 맛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원두와 물 온도, 붓는 방식도 함께 작용합니다. 분쇄도는 맛을 바꿔 보는 첫 번째 손잡이라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케멕스 그라인더는 무엇을 보고 고를까
가장 먼저 볼 것은 굵기 조절 폭입니다. 에스프레소처럼 아주 곱게 갈리는지보다, 케멕스에 쓸 중간 굵기 주변을 여러 단계로 움직일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손잡이나 다이얼을 한 칸 바꿨을 때 물 빠지는 속도가 실제로 달라져야 원두가 바뀌어도 대응하기 쉽습니다.
날이 회전하며 원두를 잘게 부수는 칼날식 제품은 갈린 입자의 크기가 들쭉날쭉해지기 쉽습니다. 굵은 조각과 미세한 가루가 함께 나오면 맛은 연한데 물은 늦게 빠지는 일이 생깁니다. 케멕스를 자주 쓴다면 두 개의 날 사이로 원두를 통과시키는 버 방식이 조절하기 편합니다. 그렇다고 비싼 그라인더가 있어야만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가격대별로 생각할 기준
- 5만 원 안팎 이하: 이미 칼날식 그라인더가 있다면 먼저 원두량과 갈아내는 시간을 일정하게 맞춰 보세요. 새로 산다면 손으로 돌리는 버 그라인더 중 조절 단계와 청소 방법을 확인하는 편이 낫습니다.
- 5만~15만 원대: 하루 한두 잔을 내린다면 수동 버 그라인더가 실용적입니다. 손에 쥐기 편한지, 한 번에 필요한 20~30g을 담을 수 있는지, 분쇄 단계가 재현되는지를 살펴봅니다.
- 15만 원 이상: 여러 잔을 자주 내리거나 손으로 가는 시간이 부담스럽다면 전동 제품의 값어치가 커집니다. 가격표보다 중간 굵기에서 가루가 얼마나 고르게 나오는지, 내부 청소가 쉬운지가 더 중요합니다.
가격은 판매 시점과 구성에 따라 달라지니 구간은 대략적인 선택 기준으로만 보시면 됩니다. 저는 케멕스 한두 잔을 마시는 분에게 전동 제품부터 권하지 않습니다. 수동 그라인더로도 충분히 좋은 컵을 만들 수 있고, 남는 예산을 신선한 원두와 저울에 쓰는 편이 맛의 변화를 더 분명하게 느끼게 해줄 때가 많습니다.
30g으로 시작해 맛을 보며 한 칸씩 조절하기
첫 추출은 원두 30g에 물 480g으로 시작합니다. 물은 92~96℃ 정도를 기준으로 잡고, 필터를 적신 뒤 그 물은 버립니다. 원두를 담아 물 60g을 고르게 붓고 30~40초 기다린 다음, 남은 물을 두세 번에 나눠 천천히 붓습니다. 물줄기가 필터 벽을 오래 때리지 않도록 원두가 놓인 부분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이 양이라면 물을 붓기 시작한 때부터 추출이 끝날 때까지 대략 3분 30초~5분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숫자에 딱 맞추려고 맛있는 커피를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밝은 로스팅의 단단한 원두와 짙게 볶아 잘 부서지는 원두는 같은 눈금으로 갈아도 흐름이 다릅니다. 먼저 시간을 적고, 마신 뒤의 인상을 한 줄 남기는 편이 정확합니다.
잔에서 느낀 맛으로 다음 분쇄도 정하기
- 너무 빨리 끝나고 신맛이 날카로우며 단맛이 약하다면 한 단계 가늘게 갈아 봅니다.
- 물이 오래 고이고 끝맛이 떫거나 입안이 마른다면 한 단계 굵게 갈아 봅니다. 필터의 세 겹이 주둥이 쪽에 있는지도 확인합니다.
- 추출 시간은 괜찮은데 전체적으로 연하다면 분쇄도만 바꾸기보다 원두량을 조금 늘리거나 물을 줄여 농도를 조절합니다.
한 번에 분쇄도, 물 온도, 원두량을 모두 바꾸면 무엇 때문에 맛이 달라졌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같은 원두로 두 잔을 내릴 수 있다면 나머지는 그대로 두고 그라인더만 한 칸 움직여 보세요. 차이가 작아 보여도 나란히 마시면 단맛이 차오르는 지점이 꽤 선명합니다.
원두를 산 날짜보다 볶은 날짜를 보기
그라인더를 바꿨는데도 매장에서 마신 향이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럴 때 저는 원두를 언제 샀는지보다 언제 볶았고, 개봉 뒤 어떻게 보관했는지를 먼저 묻습니다. 이미 갈아 둔 원두는 향이 빠르게 달라집니다. 필요한 만큼만 추출 직전에 갈고, 남은 원두는 밀폐해 열과 빛을 피해 두는 것만으로도 잔의 인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갓 볶은 원두는 가스가 활발하게 빠져 물이 고르게 닿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반대로 시간이 많이 지난 원두는 분쇄도를 맞춰도 향이 얇게 느껴질 수 있지요. 케멕스 그라인더의 눈금 하나가 모든 원두에 맞는 답은 아닙니다. 같은 레시피로 내리고, 흐름을 보고, 한 모금 마신 뒤 조금씩 옮기는 과정이 결국 집에서 좋아하는 맛을 찾는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