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찰장에 들어가기 전날, 시세보다 꽤 싸 보이는 아파트를 두고 한참 계산기를 두드린 적이 있다. 매각물건명세서의 임차인란을 다시 읽다가 입찰표를 접었다. 보증금 2억 7천만 원. 싸게 낙찰받는다고 끝나는 물건이 아니었다.
선순위 임차인 경매에서 먼저 볼 숫자는 최저매각가격이 아니다. 임차인이 배당받고도 돌려받지 못할 보증금이 얼마인지, 그 돈을 누가 부담하는지다. 이걸 놓치면 낙찰가를 잘 써내고도 비싸게 산다.
전입일 하나만 보고 선순위라고 판단하면 틀린다
주택 임차인이 새 소유자에게 임대차를 주장하려면 주택을 인도받아 점유하고 주민등록을 마쳐 대항력을 갖춰야 한다. 주택임대차보호법상 그 효력은 두 요건을 마친 다음 날부터 생긴다. 계약서에 적힌 입주 예정일이나 전입신고를 한 날 자체를 대항력 발생일로 적어두면 하루 차이로 순위가 뒤집힐 수 있다.
가령 임차인이 3월 4일 입주와 전입신고를 모두 마쳤고 근저당권 설정등기가 3월 5일 접수됐다면, 날짜만 대충 훑고 앞선다고 단정할 수 없다. 대항력 발생 시점과 등기 접수 시점을 정확히 대조해야 한다. 실제 물건에서는 계약일, 확정일자, 전입일, 점유 시작일이 서로 다른 경우도 흔하다.
확정일자는 또 다른 문제다. 대항력은 낙찰자에게 임대차를 주장할 수 있는지와 관련되고, 우선변제권은 경매대금에서 어떤 순서로 보증금을 받을지와 관련된다. 대법원도 두 권리의 내용과 요건을 구별한다. 그래서 ‘전입이 빠르다’는 말만 듣고 배당액까지 확정하면 위험하다.
배당요구를 했어도 보증금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초보 때 가장 헷갈리는 대목이 여기다. 임차인이 배당요구를 했으니 낙찰자가 신경 쓸 보증금은 없겠지, 하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대항력 있는 임차인이 배당받은 금액이 보증금 전액에 못 미치면 잔액을 낙찰자에게 주장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대법원 판례도 보증금 전액을 배당받지 못한 대항력 있는 임차인의 잔액 청구를 인정한다.
숫자로 놓고 보면 금방 보인다. 아래는 계산을 설명하기 위한 가상 사례다. 낙찰가 2억 4천만 원, 임차보증금 2억 7천만 원, 임차인에게 돌아갈 배당금을 2억 1천만 원으로 가정하자. 대항력이 유지되고 보증금 잔액을 낙찰자가 인수한다면 6천만 원을 더 준비해야 한다. 내 돈이 들어가는 출발점은 2억 4천만 원이 아니라 3억 원이다.
여기에 취득세 등 취득 비용 1천2백만 원, 수리비 8백만 원을 가정하면 3억 2천만 원이다. 인근 실거래와 현장 상태를 반영한 예상 매도가가 3억 1천만 원이라면 이미 1천만 원이 모자란다. 잔금대출 이자와 보유 중 관리비, 매도 비용은 아직 넣지도 않았다. 세금과 비용은 물건 및 보유 조건에 따라 달라지므로 실제 입찰 전에는 따로 계산해야 한다.
서류 세 장의 날짜와 금액이 서로 맞는지 본다
나는 먼저 등기사항전부증명서에서 근저당권·압류 등 권리의 접수일을 적는다. 그다음 매각물건명세서에서 임차인의 점유, 전입, 확정일자, 보증금, 배당요구 여부와 매수인이 인수할 수 있는 사항을 확인한다. 현황조사보고서에서는 누가 실제로 살고 있는지, 조사 당시 어떤 말을 했는지 본다. 같은 임차인을 두고도 서류별 기재가 다르면 그 차이부터 풀어야 한다.
- 전입신고일과 실제 점유 시작일은 확인되는가.
- 확정일자와 배당요구 여부, 배당요구 종기는 어떻게 기재돼 있는가.
- 신고된 보증금과 계약 갱신·증액 내역은 일치하는가.
- 배당 예상액을 뺀 보증금 잔액을 입찰가에 더했는가.
서류는 임차인의 주장을 확인하는 출발점이지 보증금 지급 내역까지 보증해 주는 종이가 아니다. 특히 다가구주택이나 계약을 여러 번 갱신한 물건은 다른 임차인의 보증금과 확정일자까지 얽힐 수 있다. 금액이나 날짜가 불분명하면 법원 기록을 더 확인하고, 필요하면 전문가에게 개별 권리관계를 검토받는 편이 낫다.
명도와 대출까지 계산해야 입찰가가 나온다
보증금 잔액을 돌려받을 권리가 있는 임차인을 단순 점유자로 보고 명도비 몇백만 원만 잡는 계산은 맞지 않는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임대차기간이 끝나도 보증금을 반환받을 때까지 임대차관계가 존속하는 것으로 본다. 임차인과 언제, 어떤 금액을 지급하고 집을 인도받을지 협의할 여지도 입찰 전에 생각해야 한다.
잔금대출도 감정가나 낙찰가만 보고 예상하면 곤란하다. 금융기관이 인수 보증금과 권리관계를 어떻게 평가할지에 따라 조달 가능한 금액이 달라질 수 있다. 입찰보증금, 잔금, 인수할 보증금, 취득 비용을 각각 적고 자기자본으로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한다. 배당액은 예상과 실제가 달라질 수 있으니 한 금액만 믿고 한도를 꽉 채우지는 않는다.
그날 내가 입찰을 접은 건 선순위 임차인이 있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배당 후 남을 보증금을 확신할 자료가 부족했고, 가장 좋은 시나리오로 계산해도 수익의 여유가 얇았다. 경매에서는 입찰표를 쓰지 않은 날에도 손실을 피한 셈일 때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