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친구가 백상예술대상 드라마 중 하나만 골라 달라고 했다. 수상작부터 틀면 되겠지 싶다가도, 그 친구가 긴 감정극은 힘들어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작품상은 작품을 고르는 좋은 출발점이지만, 내 취향까지 대신 골라주지는 않는다.
2026년 제6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드라마 작품상은 ‘은중과 상연’이 받았다. ‘미지의 서울’은 연출상과 박보영의 여자 최우수 연기상,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는 류승룡의 방송 부문 대상과 유승목의 남자 조연상을 받았다. JTBC가 공개한 시상 영상과 수상 결과를 기준으로, 스포일러 없이 각 작품이 어떤 밤에 어울리는지 골라봤다.
오래된 관계를 곱씹고 싶다면 은중과 상연
‘은중과 상연’은 열 살 무렵 만난 두 여자의 관계를 오랜 시간 따라간다.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질투하고, 멀어졌다가 다시 마주한다. 넷플릭스의 작품 소개만 봐도 마지막 여정에 동행해 달라는 부탁이 이야기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그래서 가벼운 우정담을 기대하고 시작하면 감정의 무게가 예상보다 크게 다가올 수 있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건 누가 옳았는지 빨리 판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 시간을 보내도 두 사람이 간직한 기억은 다르다. 한쪽의 상처를 이해한 직후 다른 쪽의 외로움도 보인다. 2026년 작품상과 송혜진 작가의 극본상이 함께 간 이유를, 나는 이런 시선에서 찾았다. 큰 사건보다 말하지 못한 감정의 변화를 따라가는 드라마를 좋아한다면 잘 맞는다.
다만 한 회를 끝내고 바로 다음 회로 넘기는 식의 몰아보기에는 마음이 조금 지칠 수 있다. 친구나 가족과 오래 묵힌 감정이 있는 날이라면 더 그렇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고, 한두 회씩 여운을 두며 보는 편을 권한다.
지친 마음에 숨 쉴 틈이 필요하다면 미지의 서울
‘미지의 서울’은 얼굴만 같은 쌍둥이 자매가 서로의 삶을 바꾸면서 시작한다. 설정만 들으면 신분 바꾸기 소동처럼 보이지만, tvN이 소개한 중심에는 각자가 자기 삶을 다시 찾아가는 이야기가 있다. 박보영이 두 인물을 연기한다는 점도 재미다. 같은 얼굴인데 말투와 몸의 긴장감이 달라서 자매의 처지가 자연스럽게 구분된다.
‘은중과 상연’이 관계의 오래된 매듭을 들여다본다면, ‘미지의 서울’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버거운 사람에게 더 가까이 온다. 직장과 가족 앞에서 괜찮은 척해 본 적이 있다면 두 자매가 서로의 하루를 살아보는 과정이 꽤 아프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 로맨스와 주변 인물들의 온기가 숨 쉴 틈을 준다.
박보영의 연기상을 보고 관심이 생겼다면, 표정 차이를 맞히는 재미보다 두 사람이 왜 자기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는지에 주목해 보길 권한다. 빠른 전개나 강한 반전을 원한다면 초반 속도가 느리게 느껴질 수 있다. 대신 인물을 알아갈수록 위로가 쌓이는 쪽이다.
직장인의 씁쓸한 웃음이 끌린다면 김 부장 이야기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는 제목부터 남의 이력서를 읽는 기분이 든다. 집도 있고 직함도 있는 사람이 왜 흔들릴까. 드라마는 익숙한 성취가 무너질 때 자신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묻는다. 넷플릭스의 작품 소개 역시 갑작스러운 추락 뒤 자기 발견을 시작하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로 소개한다.
이 작품은 회사를 다녀 본 사람에게 특히 구체적으로 닿는다. 회의실에서의 체면, 집에서는 쉽게 꺼내지 못하는 불안, 직함이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이 한 사람에게 겹쳐 있다. 류승룡의 방송 부문 대상 수상은 김 부장을 무조건 응원하게 만드는 연기보다, 때로는 답답하고 민망한 사람으로 보이게 한 연기가 인정받은 결과로 읽힌다.
퇴근 후 회사 이야기를 또 보는 게 싫다면 지금은 건너뛰어도 좋다. 반대로 인생의 기준을 바꿔야 할 것 같은 시기에 있다면, 화려한 성공담보다 이 어수선한 중년의 이야기가 더 오래 남을 수 있다.
감정보다 사건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면
앞의 세 작품이 모두 끌리지 않는다고 해서 백상예술대상 드라마가 취향에 맞지 않는 건 아니다. 2026년 드라마 작품상 후보였던 ‘파인: 촌뜨기들’은 1977년 신안 앞바다의 보물을 노리는 사람들을 따라간다. 디즈니플러스의 소개처럼 출발점부터 욕망과 도굴이 얽힌 범죄극이다. 인물의 마음을 천천히 해석하기보다 누가 누구를 믿고 배신할지 지켜보는 재미가 크다.
조금 더 가볍고 화사한 장르를 원한다면 또 다른 후보작 ‘폭군의 셰프’가 있다. 미래에서 온 셰프와 절대 미각을 지닌 왕이 만나는 설정이라, 음식과 로맨스가 전개를 이끈다. 이채민은 이 작품으로 남자 신인 연기상을 받았다. 시대극의 무게보다 요리 장면과 두 주인공의 호흡을 기대하는 쪽에 잘 맞는다.
친구에게는 결국 ‘미지의 서울’을 골라줬다. 지금 필요한 게 강한 이야기보다 하루를 견디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고른다면 ‘은중과 상연’이다. 백상 트로피는 볼 만한 작품을 좁혀 주지만, 재생 버튼을 누르게 하는 건 그날 내 마음과 작품의 온도가 맞는 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