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1000편 넘게 봤어도 누군가 “소설 원작이면 뭐가 좋아?”라고 물으면 잠깐 멈추게 됩니다. 원작의 유명세와 영화로 보는 재미는 다르니까요. 어떤 날엔 인물의 말 한마디가 오래 남는 작품이 좋고, 어떤 날엔 책장을 넘길 틈도 없이 화면에 빠져들고 싶습니다. 취향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네 편을 골랐습니다. 아래에는 이야기의 출발점만 적었습니다. 반전과 끝 장면에 관한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인물의 선택을 오래 생각하고 싶다면 작은 아씨들
그레타 거윅의 2019년 영화 <작은 아씨들>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을 바탕으로 네 자매의 삶을 그립니다. 익숙한 고전이라 전개가 뻔할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영화는 조가 지난날을 돌아보는 방식으로 시간을 오갑니다. 같은 대화도 자매가 어릴 때와 어른이 된 뒤에 놓이면 무게가 달라집니다. 처음 볼 때는 장면이 언제인지 잠시 헷갈릴 수 있지만, 옷차림과 가족이 함께 있는 공간을 따라가면 금세 익숙해집니다.
이 작품을 권하고 싶은 사람은 큰 사건보다 관계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네 자매가 바라는 삶은 서로 다르고, 영화는 누구의 선택이 더 낫다고 재촉하지 않습니다. 원작을 읽었다면 조와 에이미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재미가 있고, 읽지 않았어도 가족 안에서 자기 몫의 삶을 찾으려는 마음은 충분히 와닿습니다. 속도감 있는 사건을 기대한다면 다소 잔잔할 수 있습니다. 대신 보고 난 뒤에는 가장 공감한 자매가 누구였는지 이야기하고 싶어집니다.
무거운 날에도 몰입하고 싶다면 마션
앤디 위어의 소설을 옮긴 2015년 영화 <마션>은 화성에 홀로 남은 우주비행사 마크 와트니의 생존기입니다. 설정만 들으면 고립과 절망으로 가득할 듯하지만, 이 영화의 리듬은 의외로 경쾌합니다. 와트니는 눈앞의 문제를 하나씩 풀고, 지구에 있는 사람들도 그를 데려올 방법을 찾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과학적 문제 해결 과정을 손에 잡히는 행동으로 보여줘서, 우주 과학을 몰라도 다음 시도를 기다리게 만듭니다.
재난 영화는 보고 싶은데 두 시간 내내 우울해지고 싶지는 않은 사람에게 잘 맞습니다. 원작이 계산과 시행착오를 차근차근 읽는 재미라면, 영화는 혼자 버티는 사람과 그를 돕는 사람들이 동시에 움직이는 재미가 큽니다. 물론 위기가 연달아 찾아와 긴장감은 있습니다. 그래도 영화를 끌고 가는 감정은 공포보다 유머와 끈기 쪽에 가깝습니다. 오늘 한 편만 틀어놓고 끝까지 몰입하고 싶다는 친구에게 제가 가장 먼저 꺼내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낯선 세계에 푹 잠기고 싶다면 듄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드니 빌뇌브의 <듄>은 사막 행성 아라키스를 둘러싼 권력 다툼에서 시작합니다. 세계관 설명을 대사로 길게 풀기보다, 거대한 우주선과 메마른 풍경, 낮게 울리는 소리로 먼저 체감하게 합니다. 화면이 주는 압도감은 분명하지만, 처음부터 세력과 인물 이름을 모두 외우려 하면 오히려 피곤해집니다. 폴과 그의 가족이 왜 아라키스에 왔는지만 붙잡고 따라가도 첫 관람에는 충분합니다.
이 영화는 익숙한 규칙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기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권합니다. 2021년 개봉한 첫 편만으로 모든 갈등이 끝나지는 않으니, 완결된 이야기를 한 편 안에서 보고 싶은 날에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긴 호흡의 서사를 즐긴다면 첫 편이 쌓아 올린 불안과 규모가 다음 편을 볼 이유가 됩니다. 가능하면 작은 화면으로 흘려보기보다 소리와 화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 보는 편이 좋습니다.
원작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아가씨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에서 출발합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원작의 틀을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옮겼고, 부유한 상속녀에게 접근하는 하녀와 사기극이라는 출발점을 새롭게 빚었습니다. 책을 먼저 읽은 사람에게는 옮겨진 시대와 공간을 비교하는 재미가, 영화를 먼저 보는 사람에게는 누구의 시선을 믿어야 할지 가늠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다만 가볍게 볼 로맨스를 찾는 사람에게 권하기는 어렵습니다. 노골적인 성적 장면과 폭력적인 표현이 있고, 인물 사이의 힘 관계도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요소를 감당할 수 있고 시점이 바뀌며 이야기가 새 얼굴을 드러내는 영화를 좋아한다면 강하게 남을 작품입니다. 이 영화만큼은 줄거리 소개를 더 찾아보지 않는 편을 권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작은 정보도 감상의 순서를 바꿀 수 있으니까요.
네 편의 공통점은 책의 내용을 화면에 옮겼다는 사실보다, 영화만의 감각으로 다시 들려준다는 데 있습니다. 마음이 사람에게 가는 날엔 <작은 아씨들>, 이야기에 힘껏 끌려가고 싶은 날엔 <마션>을 고릅니다. 낯선 세계에 오래 머물 여유가 있다면 <듄>, 원작과 각색의 차이를 즐기고 싶다면 <아가씨>가 남습니다. 좋은 소설 원작 영화는 책을 읽었는지보다 지금 어떤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지에 더 정확히 답해줍니다.
